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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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일호의미술여행] 단조로움을 뚫고 나오는 힘과 역동성

미술의 변화를 가져온 20세기의 큰 사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난 세계대전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예술가들은 인류를 전쟁으로 내몬 사회의 광기로부터 벗어나려 했고, 사회적 관습과 전통의 부정을 넘어 예술적 사고까지 부정하는 반예술 운동인 다다이즘이 뒤를 이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0년 만에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이번에는 철학,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변화를 일으켰다. 문명의 발달을 가져온 이성적 능력으로 무기도 만들어 인간을 대량으로 살상한 비극적 상황을 목격했기에 사회 전반에 걸쳐 이성적, 합리적 사고에 대한 불신 풍조가 퍼져 나갔다.

예술가들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지역을 찾아서 새로운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가 된 미국의 뉴욕으로 향했다. 현대미술의 중심지가 유럽의 파리에서 미국의 뉴욕으로 바뀌었고, 1940년대 후반부터 뉴욕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추상미술이 일어났다.

프란츠 클라인, ‘형상 8’

기하학적 추상처럼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경향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고, 추상표현주의라는 반이성적 경향의 미술이 등장했다. 기하학적 추상의 선명한 윤곽선, 정형적인 형태, 평면적인 색채 대신 느슨하면서도 빠른 붓놀림, 무정형의 형태들, 끊어진 색채 자국들과 리듬, 물감의 불균등한 밀도와 채도 등이 강조됐다.

뒤늦게 추상표현주의에 합류한 프란츠 클라인은 거친 붓 자국을 화면 아래위로 휘갈겨 ‘8’자를 변형해 놓은 듯한 형상을 만들었다. 거대한 캔버스 위에 검은색 붓질을 휘갈긴 행위가 동양의 서예를 연상시키면서 무성의해 보였던 그림에서 힘과 역동성이 배어 나온다.

거친 붓 자국이 위를 향해 뻗어 올라가기도 하고 아래로 곡선 커브를 그리며 떨어지기도 한다. 급히 꺾이고 끊어졌다가 이어지기도 하는 다양한 리듬이 우리를 조용한 화면 속으로 빨아들인다. 하얀 여백과 힘찬 검은색 선들 사이의 긴장감도 주목할 만하다. 검은색선 하나만으로 이루어낸 효과가 이처럼 다채로울 수 있고, 붓질 자체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예술적 가능성이 클라인에 의해서 새롭게 열렸다.


박일호 이화여대 교수·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