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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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 오픈런·응급실 뺑뺑이… 의대 정원 확대로 난제 풀릴까 [정부 '의대 증원' 추진]

50명 미만 소규모 의대 포함
필수의료 공백·의료격차 심화
지역 우선배정이 현실적 대안

정부 “당장 의사 수 못 늘리면
필수의료 회생 기회마저 놓쳐”
의협 “정부 강행 땐 강력 투쟁”

의사 확대 왜 필요한가

인구 1000명당 서울 3.47·경북 1.39
병원 8곳서 퇴짜 맞고 숨진 환자도

2023년 소아과 전공의 충원율 10% 그쳐
다른 과보다 수입 적고 힘들어 기피
강원대는 2018년부터 한명도 없어
교수보다 연봉 더 주고 계약직 고용

의대 증원·신설 촉구 움직임

충북권 2곳 89명… 강원·전북 33% 그쳐
전남, 시·도 중 의대 없어 유치 총력전
창원 “의대, 30년 숙원” 대정부 건의안

정부가 전국 의대 정원을 대폭 늘릴 경우 비수도권 거점 필수의료기관인 국립대 의대와 정원 50인 미만 소규모 의대에 집중적으로 배정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왔다. 최근 사회문제화하고 있는 ‘응급실 뺑뺑이 사망 사건’이나 ‘수도권으로의 원정 진료·수술’ 등 필수의료 공백 사태 및 지역 간 의료격차를 완화하기 위해선 당장 2025학년도 대입부터 의대 정원을 1000명 이상으로 확대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지적이 많다.

 

17일 세계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정부는 올해 고교 2학년생들이 대입을 치르는 2025학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대폭 늘린다는 방침을 전제로 구체적인 규모와 배정 우선 순위, 의대 및 의학전문대학원 신설 여부를 신중하게 검토 중이다. 작금의 필수의료 공백 사태나 지역 간 의료격차를 해소하기 위해선 근본적으로 의사 수 증원에 나설 수밖에 없고, 2006년 이후 3058명으로 동결 중인 의대 정원을 확대하는 게 가장 현실적인 첫걸음이라는 공감대가 있어서다.

17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 앞에 교육 과정과 관련한 광고 문구가 적혀 있다. 연합뉴스

정부 관계자는 “의대 정원을 늘려도 의료 현장에 배치되려면 10년 이상이 걸려 지금 배출되는 의사 수를 늘리지 않으면 필수의료나 지방을 살릴 기회조차 확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의대 정원 확대 규모가 정해지면 이들 증원분이 (약 10년 후 의사로 양성됐을 경우) 필수의료 지역 거점 역할을 맡고 있는 국립대의대나 (교수진·시설의 효율화 측면에서) 정원 50인 미만 의대에 우선 배분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지역 의료 현장에서도 의대 정원 확충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남우동 강원대병원장은 이날 경북대에서 열린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에서 국민의힘 이태규 의원이 의료 인력 확충에 대해 묻자 “경험과 소신에 비춰 의료인력 확충은 100% 필요하며 지금 해도 늦다”고 말했다. 양동헌 경북대병원장 역시 “지역 필수 의료와 중점 의료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고 답했다.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의 의료진의 모습. 뉴스1

정부의 의대 정원 대폭 확대 추진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국보다 턱없이 적은 국내 의사 수가 한 요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김윤 서울대 교수(의료관리학)는 세계일보에 “2021년 기준 OECD 평균 의사 수는 인구 1000명당 3.7명인 반면 한국은 한의사까지 포함해 2.5명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이어 “한국의 인구 10만명당 의대 졸업생은 7.4명으로 OECD 평균(13.5명)의 55% 수준”이라며 “각각 30년 후, 60년 후에 OECD 평균에 도달하려면 5500명, 3500명의 의대 정원 증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이날 ‘긴급 의료계 대표자 회의’를 열고 “정부가 의료계와 합의 없이 의대 정원 확대를 강행할 경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저항해 나가겠다”고 결의했다. 이필수 의협 회장은 ‘총파업을 말하기엔 이르다’면서도 “여론 수렴이나 지역 집회 등 로드맵 거쳐서 마지막 단계로는 회원들 투표를 통해 총파업에 나설 수도 있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의협)가 17일 서울 용산구 의협에서 연 '의대정원 확대 대응을 위한 긴급 의료계 대표자 회의'에서 이필수 의협 회장이 인사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수도권·지방 의사 인력 양극화… 응급실 뺑뺑이·진료 ‘오픈런’

 

경북 안동에 거주하는 직장인 김모(31)씨. 며칠 전 새벽 연거푸 마른기침을 해대던 두 살배기 딸의 체온이 40도를 넘었다. 곧바로 안동의 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입원 치료가 필요한 ‘폐렴’ 진단을 받았지만, 전문의가 없다며 다른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유받았다. 김씨는 수소문 끝에 130㎞ 떨어진 대구의 종합병원까지 차를 몰아야 했다.

 

17일 국민의힘 이태규 의원이 전국 9개 지방국립대 병원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올해 8월 기준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충원율은 10%에 그치고 있다. 5년 전인 2018년만 해도 충원율은 100%였다. 다른 과에 비해 수입이 적고, 일이 고되다는 이유로 전공의들이 소아청소년과를 기피하고 있어서다. 강원대의 경우 2018년부터 현재까지 소아청소년과 전공의를 1명도 충원하지 못했다. 강원대는 결국 전임교수보다 더 많은 연봉을 주고 계약직 의사를 고용해 겨우 진료를 보고 있다. 강원대병원 전임교수직의 올해 평균 연봉(1년 환산치 추정)은 1억5300만원, 계약직 의사는 1억6400만원으로 1000만원 이상 차이가 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수도권 지역에서도 소아과 진료 대란이 벌어지며 병원 영업시간 전부터 대기하는 ‘오픈런’ 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서울로 ‘원정 진료’ 온 환자들 서울 강남 일대 대형 종합병원의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 등 지방에서 올라온 이용객들이 17일 고속철도 수서역 앞 버스정류장에서 병원 셔틀버스에 탑승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연합뉴스

수도권과 지방의 의사 인력 양극화도 심각하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해 인구 1000명당 활동의사 수가 서울은 전국 평균(2.18명)을 넘는 3.47명인데 반해 경북은 1.39명으로 차이가 컸다. 충남(1.53명), 충북(1.59명) 등도 평균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이른바 ‘응급실 뺑뺑이’ 사고도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월 경기 용인에서는 차에 치인 70대 노인이 응급실을 찾지 못해 사고 현장에서 100㎞ 떨어진 병원으로 향하던 중 결국 숨졌다. 당시 119 구급대가 치료를 요청한 병원은 모두 12곳이었다. 올해 3월 대구에서는 건물에서 떨어진 10대 여학생이 병원 8곳에서 퇴짜를 맞고, 2시간 넘게 구급차에서 내리지도 못한 채 숨졌다.

 

소아청소년과, 응급의학과, 산부인과 등 필수의료 분야 의료 인력 부족 문제가 수년 전부터 제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다. 특히 지방의 경우 상황이 더 심각하다. 의사와 환자 모두 수도권 병원으로 몰려들며 지방 의료 인프라 자체가 붕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이다.

정부가 의료계 반대로 십수년간 풀지 못했던 ‘의대 정원 확대’라는 난제를 정면 돌파하려는 데는 이러한 배경이 깔려 있다. 의대 정원을 대폭 늘리면 필수의료나 지방 병원으로도 의사들이 이동하는 ‘낙수 효과’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이날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 의사인력전문위원회 모두발언에서 “정부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응급실 뺑뺑이’, ‘소아과 오픈런’ 등 현실을 엄중하게 인식하고 있다”며 “의사 수 증원을 더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정부가 2025학년도 대입부터 의대 정원을 1000명 이상 확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정원 배분 방식에도 이목이 쏠리고 있다. 정부는 2020년 추진했던 의대 정원 확대 방침과 마찬가지로 소규모 대학에 우선 배치하되, 증원된 학생을 양성할 수 있는 교수, 장비 등 확보 여부를 가려낼 것으로 보인다. 국내 의대는 모두 40곳이다. 국립대 11곳 중 3곳은 정원이 50명 밑이고, 사립대 의대 29곳 중 14곳은 정원이 60명 이하다.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지금의 대학 시설과 교수 인력으로는 갑자기 늘어난 학생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박대균 순천향대 의대 교수(해부학교실)는 “정원이 적은 대학의 경우 (교수, 인프라 부족 등으로) 늘어나는 인원을 감당하기 어려울 수 있다”며 “각 의대에 2∼3년 정도 시간을 줘야 하고 대학이 떠안아야 하는 부담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의 의료진의 모습. 뉴스1

◆‘의료 취약’ 지자체들, 벌써 유치전 과열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확대 방침이 확정되기도 전에 벌써부터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유치 과열 조짐이 보이고 있다. 기존 의대에만 정책이 적용될 것으로 알려지자 의대 신설에 기대를 걸었던 지역에선 상경 투쟁과 강경 집회까지 예고했다.

 

의대 정원이 다른 도의 절반도 안 되는 충북은 정원 확대에 가장 적극적이다. 충북권 의대 정원은 충북대학교 49명,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충주) 40명으로 인구가 비슷한 강원(267명)·전북(235명)의 3분의 1에 불과하다. 김영환 충북도지사는 17일 “이번 정부 정책을 통해 현재 비수도권 광역도 의대 정원 평균인 197명을 넘어 충북대 의대 증원 101명 이상, 카이스트 과학기술의학전문대학원 신설 50명, 국립 치과대학 신설 70명을 합쳐 총 221명 이상 증원을 요구할 방침”이라고 강조했다. 균형발전 지방분권 충북본부도 전날 “2025학년도 입시부터 충북에 최소 158명(치과대학 50명 포함) 이상 최우선 배정하라”라고 촉구했다. 의대 정원 확대를 계기로 카이스트의 과학기술의전원 신설 시도가 동력을 얻을지도 주목된다.

 

의대 설립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전남은 관련 언급이 아예 없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전국 광역시도 중 유일하게 의대가 없는 전남은 의대 유치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정부 정책 방향이 ‘의과대학 신설’보다 ‘기존 의대 정원 증원’ 쪽으로 기울자 지역 정치권은 상경 투쟁 계획을 세우고 강경 집회까지 열기로 했다. 전남 지역 국회의원과 도의원, 목포대·순천대 총장 등 500여명은 18일 국회 소통관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각각 집회를 열고 전남권 의대 신설의 당위성을 알릴 방침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인구 100만명 이상 비수도권 대도시 중 유일하게 의대가 없는 경남 창원시도 경남도의회와 창원시의회에서 의대 유치를 위한 대정부 건의안을 채택하는 등 분위기가 뜨겁다. 경남 지역 의대는 경상국립대 1곳뿐으로, 인구 10만명당 의대 정원이 전국 평균 5.9명인데 반해 경남 지역은 2.3명에 불과하다. 홍남표 창원시장은 “매년 20만명이 경남에서 수도권으로 원정 진료를 떠나는 현실에서 문제 해결의 유일한 답은 창원 의과대학 설립”이라며 “30년 숙원을 반드시 이뤄낼 것”이라고 강조했다.

 

전북 지자체와 대학들은 의대 정원 늘리기로는 의료 확보 등에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고 의전원 설립과 의대 신설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국회에 법안이 장기 표류 중인 국립 공공의전원 설립을 촉구하고 있다. 남원 의전원 설립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미 당정이 합의하고 복지부·교육부 협의까지 마쳤다. 이용호 의원이 2018년 공공의대 설립 법안도 발의했지만 5년이 지나도록 의사단체 반발 등을 의식해 국회를 통과하지 못한 채 장기 표류하고 있다.


송민섭·박지원·이정우·이정한 기자, 대구=김덕용 기자, 안동=배소영 기자, 무안·대전·창원=김선덕·강은선·강승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