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흘리 아랍 병원은 세계에서 가장 갈등이 깊은 지역의 중심에 있는 평화와 희망의 안식처입니다.”
17일(현지시간) 공습을 받아 수백명이 숨지는 참사가 일어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북부 가자시티의 아흘리 아랍 병원에 대해 성공회 예루살렘 교구는 이같이 설명하고 있다. 1882년 영국 선교사들이 설립해 가자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이 병원은 80개 병상을 갖추고 매년 4만5000명의 주민을 무료로 진료해주고 있다.
기독교에 뿌리를 둔 성공회가 운영 중인 병원이지만, 종교와 무관하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병원 이름 자체가 ‘아랍 사람들의 병원’이라는 뜻의 아랍어다. 직원들도 대부분 무슬림이다. 병원 측은 홈페이지를 통해 “누구나 환영합니다. 모든 사람을 존엄과 존중으로 대합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병원 측은 잇단 국경 충돌과 불안, 2018년 ‘유엔 팔레스타인 난민구호기구’(UNRWA)에 대한 미국의 자금 지원(연간 약 3억5500만달러) 중단, 코로나19 대유행 등 최근 수년간 겪은 어려움 속에서도 의료진은 수질 오염, 식량난, 정신적·사회적 트라우마, 의약품·연료 부족 등 끔찍한 환경에 처한 환자들을 돕기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지난 13일 이스라엘군이 가자지구 북부 주민들에게 대피령을 내린 이후 피란민들이 대거 이 병원으로 몰려들면서 이날 공습 피해가 커진 것으로 보인다. 이곳 역시 대피 명령을 받은 가자지구 북부 20개 병원 중 한 곳이지만, 진료와 피란민 수용을 계속해왔다.
이 병원은 대피령 직후인 지난 주말 이스라엘군의 로켓포 공격을 받았다. 세계 성공회의 수장 격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는 15일 성명을 내고 “어젯밤 아흘리 아랍 병원이 공격을 받아 직원 4명이 다쳤다”며 이스라엘 측에 대피령 철회를 촉구했다. 그는 “가자지구 북부 의료시설에 있는 중환자와 부상자들은 안전하게 대피할 수 없고 의료 물품도 부족해 재앙에 직면해 있다”고 우려했다.
평화의 안식처였던 이곳은 결국 민간인 수백명이 목숨을 잃는 아비규환의 현장으로 변했다. 현장에서 촬영된 영상을 보면 병원 건물을 불길이 뒤덮었고, 참혹한 시신 대다수는 어린이였으며, 주변 잔디밭에는 담요와 책가방 등이 나뒹굴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레바논, 시리아, 요르단을 관할하는 성공회 예루살렘 교구는 성명을 내고 “국제적 비난과 응징을 받아 마땅하다”며 “헌신적인 직원들과 연약한 환자들에 대한 극악무도한 공격에 애도하며 연대해주기를 간청한다”고 밝혔다.
세계를 경악시킨 이 병원 공습에 대해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이슬라믹 지하드’(PIJ)의 오폭 때문이라며 책임을 돌리고 있다. 미국 국가대테러센터(NTCT)에 따르면 1979년 창설된 PIJ는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무장정파 하마스에 이어 두 번째로 규모가 큰 이슬람 수니파 무장단체이다. 알쿠드스여단이라는 군사조직을 갖추고 이스라엘에 박격포, 로켓, 자살폭탄 공격을 주로 벌인다. 가자지구뿐 아니라 서안지구, 레바논, 시리아에도 지부가 있다. 하마스와 공조를 취할 때가 많으나 대이스라엘 전략을 두고 양측이 긴장 관계에 놓일 때도 많다. 두 조직 모두 이란의 지원을 받으며, 미국·이스라엘이 테러 조직으로 지정했다.
PIJ 측은 “시온주의 적(이스라엘)이 잔인한 학살의 책임을 회피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밝혔다. PIJ는 병원에 대한 이스라엘의 대피 명령, 폭발 규모, 폭탄 낙하 각도 등이 모두 이스라엘의 소행임을 가리키고 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