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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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규의한·미동맹사] 한국의 대(對)중동 외교와 ‘동맹의 딜레마’

지난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통제하는 이슬람 급진주의 무장 조직 하마스가 육상·해상·공중에서 다영역·입체 기습공격을 가하여 이스라엘은 물론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은 1948년부터 1973년까지 4차례의 전쟁을 치렀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의 기습공격으로 시작된 제3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군이 시나이반도, 요르단강 서안, 골란고원 일대를 점령하며 6일 만에 종결되었다. 영토를 빼앗긴 이집트, 시리아 등 아랍 국가들은 절치부심했고, 1973년 10월 6일 제4차 중동전쟁(일명 ‘욤 키푸르’ 전쟁)을 일으켰다. 불과 20일 남짓 진행된 전투였지만, 이스라엘은 건국 이래 최악의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이런 상황을 역전시킨 것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가장 중요한 동맹 관계로 각인되어 있으나 실상은 한미 동맹이나 미일 동맹과 같은 구체적인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바 없다. 그래서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인지적 동맹(cognitive alliance)’으로 부른다. 

 

한국과 이스라엘 간의 관계는 6·25전쟁 시기로부터 시작됐다. 벤구리온 수상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이스라엘군의 참전을 추진하였으나, 북한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일부 정당의 반대로 실제 참전하지는 못했다. 이에 벤구리온 수상은 1951년 10만 달러 규모의 의료, 식량 등 물자를 한국에 제공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1973년 제1차 오일 쇼크, 미국 주유소에 기름을 구하려 줄을 선 사람들.

한국은 1961년 12월 이집트와의 영사 관계 수립을 시작으로 1962년 이스라엘(4월), 요르단(7월), 사우디(10월), 이란(10월) 등과 수교하였다. 그러나 제3차 중동전쟁에 따른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1969년 10월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의 개설 등으로 아랍 국가들의 반한 감정이 고조됐다. 1972년 12월 5일 정부는 “중동사태에 관한 기본입장” 발표를 통해 이스라엘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와 팔레스타인 주장이 존중되어야 함을 천명하였다.

 

1973년 6월 23일 남·북한 평화통일 외교 선언 발표에 따른 할슈타인 원칙의 포기, 미·소 간 데탕트 심화에 따른 국제환경의 변화로 기존의 대(對)중동정책이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우리 정부는 제1차 오일 쇼크를 계기로 비동맹외교 수준으로 접근하던 중동 외교를 친아랍정책으로 전환하였고, 이를 기점으로 중동에 대한 경제적 진출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1978년 2월 대한민국과 이스라엘은 양국 대사관을 철수하였다. 냉전 종식 후 1992년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이 1994년 주이스라엘 대한민국 대사관이 재개설됐다.

 

한국은 동맹국인 미국과 함께 베트남전에 참전하였다. 제3차 중동전쟁에서 한국은 미국과 함께 이스라엘을 지지하였지만, 제4차 중동전쟁에서는 원유 공급망의 안정적 확보와 중동 진출이라는 경제적 이익을 우선하며 동맹국 미국과는 다른 선택을 하였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다만 영원한 국가이익이 있을 뿐이다.’라는 금언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장면이다.


최완규 육사 외래교수·경제사회연구원 국방센터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