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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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박희병과 황현산, 그리고 선배의 역할

후대를 위한 경험의 전수와 모범 또는 반면교사 되는 것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3월, 한국 고전문학 분야에서 손꼽히는 학자 박희병 서울대 교수의 강의가 줌으로 열렸다. 단군신화부터 김소월 시까지 한국 고전문학을 통사적으로 다루는 ‘한국고전문학사’ 강의였다.

퇴임을 앞둔 그의 마지막 강의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평소 30명 안팎이던 수강생은 60명을 훌쩍 넘겼다. 국문과는 물론 인류학과, 경영학과, 디자인학과 등 다양한 전공의 학부생 61명이 수강했을 뿐 아니라 교수를 비롯해 청강생도 16명이나 참여했다. 강의는 매주 월요일과 수요일 오후 2시에 시작해 75분간, 모두 32강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열띤 토론과 질문, 답변으로 정규 강의시간인 오후 3시15분을 넘기기 일쑤였다. 강의에 집중된 눈, 질문과 답변 속에 쏠린 열의…. 따분한 과목으로만 여겨지는 고전문학 수업의 대반전이었다.

김용출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박 교수는 마지막 대학 강의에서 40년 가까이 갈고닦은 지식과 사유, 노하우를 모두 쏟아부었다. “문학사에 등장하는 인간들의 ‘마음’이나 ‘정신’을 들여다보는 데 힘을 쏟았다”는 그의 말처럼, 단순한 지식을 넘어 인간들의 다양한 마음과 대면하도록 도왔다. “내 정신이 가장 고양된 상태에서 이뤄졌다”고, 그는 회고했다.

박 교수는 두 해 전 이뤄진 마지막 강의 내용을 정리하고 담아서 최근 세 권짜리 책 ‘한국고전문학사 강의’(돌베개)를 펴냈다. 강의록뿐 아니라 학생들과 주고받은 질문과 답변까지 담아 강의와 그 문제의식까지 생동감 있게 느끼도록 했다.

역시 두 해 전 겨울, 황일우 서울대 교수는 경기 포천 지현리에 위치한 아버지인 불문학자 고 황현산 선생의 작업실 컴퓨터를 정리하다가 파일 하나를 발견했다. 아래아한글 형식으로 정리된 파일 이름은 ‘악의 꽃(1) 번역 원고’. 현대시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샤를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을 완역한 원고였다.

최종 수정 시간은 황 선생 타계 직전인 2018년 7월1일 오전 8시 56분. 황 선생이 입원한 것은 그해 7월 중순이었고 곧이어 8월 8일 숨을 거뒀다는 점에서, 타계 직전까지 작업한 결과물이었다. 어느 날 “번역을 끝냈다”고 좋아했던 그의 마지막 역작이었다.

“죽음이 우리를 위로하고, 슬프다, 살게 하니,/ 그것은 인생의 목적이요, 유일한 희망/ 선약처럼 우리를 들어 올리고 우리를 취하게 하고,/ 우리에게 저녁 때까지 걸어갈 용구를 준다.”(‘가난뱅이들의 죽음’ 부문) 황 선생의 정확하고 정갈한 번역으로 보들레르의 ‘악의 꽃’ 완역판(난다)이 최근 출간됐다. 작고 5년 만이었다.

강의와 번역, 저술을 통해 미래를 열려 한 박 교수와 황 선생의 모습에서 우리 시대 ‘선배’ 또는 ‘어른’의 역할을 다시 생각한다. 한 사회에서 선배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경험의 전수이고, 스스로 미래를 걸어감으로써 모범 또는 반면교사를 남겨주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이를 통해 집단 지식을 형성해 다른 종들과의 경쟁에서 승리, 현생 인류가 될 수 있었다고 하지 않던가. 후배이기도 하지만 선배이기도 한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그리고 우리는 지금 각자 선배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황 선생이 2015년 9월14일 오전 5시37분 트위터에 올린 글이 계속 맴돈다.

“나 죽은 후에 미래가 어찌 되건 무슨 상관인가. 그러나 그 미래를 말하는 나는 살아 있지 않은가. 좋은 미래가 나 죽은 다음에야 온다고 해도 좋은 미래에 관해 꿈꾸고 말하는 것은 지금 나의 일이다. 그것은 좋은 책을 한 권 쓰고 있는 것과 같다.”


김용출 문화체육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