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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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선 채로 기절하기 시작했어요” 생존자와 유가족이 전한 그날, 그리고 그 이후

#“선 채로 주영이한테 인공호흡을 했어요. 그렇게 한 30분을 했던 거 같아요. (중략) 둘러보니까 제 주변에 한 50명 정도 있었는데 남성 한 분이랑 저 빼고 다 의식을 잃었더라고요.”

 

이태원 참사 생존자인 서병우 씨는 지난해 10월29일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결혼을 약속한 연인 이주영씨를 떠나보냈다. 당일 웨딩플래너를 만나고 지나던 길에 구경이나 하자며 이태원을 들렀다. 해밀톤 호텔 뒤쪽 삼거리에서 갑자기 회오리처럼 밀려오는 인파를 보고 곧장 자리를 뜨려했지만 108힙합크럽 앞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난 2022년 10월 30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압사 사고 현장에 꽃이 놓여 있다. 연합뉴스

잠깐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보니 주영씨는 대각선 앞에서 선 채로 의식을 잃고 앞사람 등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그는 마주 서 있는 연인을 깨우려고 미친듯이 인공호흡을 하고 뺨도 때려보고 클럽 직원이 건네 준 물도 뿌려봤다. 한쪽 발이 꺽인 채로 소방대원을 도움을 받아 연인을 인파에서 꺼내 죽을 힘을 다해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주영씨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 골목 폭이 3미터 정도일 텐데 가로세로가 모두 사람 머리로 빼곡하게 차 있고, 그 사이로 수많은 팔들이 살려달라고 내뻗고 있고.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거에요. (중략) 외국인 한 분이 막 울면서 제 손을 잡고 정말 미안하다고 말해주었어요. 손을 뻗는 사람이 저만 있는게 아니니까 다른 사람들의 손도 잡아줘야 한다면서 정말 미안하다고....”

 

또 다른 생존자 이주현 씨도 당시 사고 현장에서 인파에 깔린 채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다. 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소리도 지를 수 없었다. 구조가 지연되자 지나가던 한 여성은 다른 사람들이 그의 손을 밟고 지나가지 않도록 한참 지켜주고 앰뷸런스에 실리기 전까지 열심히 다리를 주물러줬다. 

 

이태원 참사 발생 1주기를 앞두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 등 14명의 목소리를 기록한 인터뷰집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창비)이 25일 출간됐다. 

 

이태원 참사 발생 1주기를 앞두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생존자와 유가족 이태원 주민·노동자 등 14명의 목소리를 기록한 인터뷰집 ‘우리 지금 이태원이야’. 창비 제공

책은 참사 생존자와 희생자의 유가족·연인·친구, 이태원 노동자와 지역주민까지 그날의 재난을 가장 가까이서 경험한 이들의 구술을 통해 참사를 재구성하고, 알려지지 않았던 사연들도 함께 담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이태원 참사를 겪은 활동가와 변호사, 작가 등 13명으로 구성된 '10·29 이태원 참사 작가기록단’이 9개월간 인터뷰를 통해 이들의 애타는 마음과 트라우마, 참사 이후의 삶을 오롯이 기록했다.

 

인터뷰에 응한 박진성 씨는 생존자이자 희생자 박지혜 씨의 동생이다. 그는 어머니, 누나와 함께 할로윈 파티를 구경하려 갔다가 누나를 잃었다. 참사 후 주위 사람들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트라우마를 견디기 힘들었던 그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누나의 유품을 정리해도 빈 자리를 견딜 수가 없어 이사도 했다. 친구나 지인과의 연락도 다 끊고 당시 현장에 함께 있던 어머니에게는 고통을 털어놓치 못한채 고립되고 있었다.

 

그러다 다른 유가족들을 만나 같은 아픔을 공유하며 위안을 얻기 시작했다. 박진성씨를 비롯해 희생자들의 젊은 형제·자매들은 깊은 슬픔에 허덕이면서도 황망해하는 부모들을 대신해 의견을 제시하고, 유가족 사이의 중재자를 자처했으며, 참사로부터 돌아서려는 시민들을 다시 광장으로 불러 모아 초기 유가족 활동의 발걸음을 내딛는 원동력이 됐다. 

 

그러나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희생자와 유가족을 모욕하는 이들을 보면 여전히 가슴이 무너져내리는 듯 하다.

 

“크리스마스에 녹사평 분향소에서 추모 미사가 열렸는데 한 유튜버가 트럭에 엄청 큰 스피커를 싣고 와서 ‘울면 안 돼’라는 캐럴을 틀더라구요.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지 싶었는데 경찰은 할수 있는 일이 없다고 해요.”(p185)

 

하지만 “힘내세요”라고 용기를 주는 시민들이 더 많았다고 한다.

 

분향소가 설치되자 보이지 않아 걱정되던 유가족들과 시민들, 국회의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추모공간이 아니라 연결과 연대의 끈이 된 것이다.

 

책에 담긴 열 네편의 글은 이태원 참사로 사랑하는 사람과 평범한 일상을 빼앗긴 사람들이 치열하게 버텨온 시간에 대한 증언이자 사회를 향해 던진 질문이며 간절한 부탁이다. 이제 사회가 응답할 차례다.


김수미 선임기자 leol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