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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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고발하다… ‘소년들’ 정지영 감독 [엄형준의 씬세계]

‘부러진 화살’, ‘블랙머니’ 이어 ‘소년들’로 사회 문제 환기
가난하고 못 배운 세 소년… 경찰 강압수사에 살인자 몰려
“중학생 때 읽은 소설 영향 사회 문제 관심…질문하는 영화”

“신자유주의 이념이 우리를 지배한 후 각자도생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을 통해 이겨라 (라는 개념이) 몸에 밴 사회에서, 어느새 우리가 약자들을 ‘못나서 그래’라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진 않았을까. 이런 질문을 하는 영화죠.”

 

‘소년들’의 1일 개봉을 이틀 앞두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만난 정지영(76)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정지영 감독은 ‘소년들’이 약자에 대한 우리의 편향된 시선을 지적하는 영화라고 설명했다. 올해로 데뷔 40년을 맞은 정 감독은 사회적 이슈가 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 오고 있다. CJ ENM 제공

‘소년들’은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다. 1999년 2월6일 깊은 밤 전북 완주 삼례읍 슈퍼에 3인조 강도가 침입, 물건을 훔치는 과정에서 노인이 질식사로 사망한다. 그러자 경찰은 인근에 살던 어리숙한 청년 3명을 붙잡아 범행을 자백받은 후 기소한다. 이후 진범의 자백이 있었지만 인정되지 않았고, 강압적 수사 의혹에도 청년들은 결국 3∼6년의 징역형을 선고를 받고 복역한다. 진범의 증언과 심지어 유가족의 도움 속에 17년 후 다시 재판이 열려 무죄를 받기까지, 이들은 출소 후에도 오랫동안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영화 속) ‘세 소년’은 못 배우고 가난하고, 객관적으로 좀 모자란다고 생각하는 그런 아이들인데, 그들을 우리, 관객들, 시민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혹시 그들은 역시 우리보다 못났기 때문에 그런 범행을 할 만한 아이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았을까.”

 

올해로 데뷔 40년을 맞는 정 감독은 ‘남영동1985’, ‘부러진 화살’, ‘블랙머니’ 등 영화를 통해 꾸준히 사회적 이슈를 다뤄 왔고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그렇게 생긴 거 같아요. 좀 어려서, 중학생 때, 13권짜리 전후(戰後)문학 전집이란 걸 읽었어요. 1945년 전쟁이 끝난 이후 나왔던 주목받는 소설이나 시나 희곡 같은 것들을 모아 놓은 건데, 작가들이 전쟁이 끝난 후 사회를 그리다 보니 인간의 사랑이나 우정 이런 게 아니라 사회와 인간관계를 그렸어요. 거기서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정 감독은 실제 있었던 사건을 다루되, 여기에 상상력과 흥미를 더해 상업적 영화로 재탄생시킨다.

인터뷰에 앞서 지난 23일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정 감독은 “어떤 사람들은 저를 보고 한국의 ‘켄 로치’(영국 사실주의 영화감독)라고 하는데 다르다고 생각해요”라면서 “켄 로치는 실화를 가지고 진실성·사실성 있게 다가가지만 저는 사실에 극적 장치를 만드는(더하는) 사람 같아요”라고 했다.

 

그의 의도는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사실을 환기하는 데 있다. 영화는 사실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여기에 ‘희망’을 한 스푼 더한다. 그가 지치지 않고 영화를 만들어 온 힘도 이 작은 희망에 있는 듯했다.

 

“40주년 맞아 돌아보니까 결과적으로 영화가, 뭐랄까 내가 사는 이유 같아. 내가 가끔 살기가 싫고 이 세상이 솔직히 아름다운 거 같지 않고 인간들이 열심히 노력한 만큼 아름다워지는 것 같지 않은, 약간 허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데 내가 만든 영화를 보니까 그것을 극복하는 결말을 자꾸 내더라고. 아, 내가 영화를 통해서 나의 허무적인 생각을 극복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는 한국 영화의 위기에 직접 행동으로 나서기도 했다. 정 감독은 1980년대 후반 미국 영화배급사 UIP의 한국 시장 영화 직접 배급에 반대하며 극장에 뱀을 풀었다 체포된 적이 있다. 

당시와 비교하면 한국 영화의 위상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전까지 호황을 누렸다. 하지만 엔데믹(풍토병화)과 함께 이제 한국 영화는 다시 위기를 맞았다. 일각에선 한국 영화 위기의 요인으로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인 넷플릭스의 약진이 꼽히지만 정 감독은 과거 할리우드 영화의 공세와는 다르다고 봤다.

 

“매체는 갈수록 다양해질 수밖에 없어요. 영화감독의 입장에서 어떤 건 모니터 특성 어떤 건 극장을 염두에 두고 하는 거죠. 변곡점에선 혼란이 오고 그러다가 잡히는 거죠.”

 

그는 한국 영화의 위기는 대기업 취향의 비슷한 영화를 양산해 온 영향이고, 특정 영화가 스크린을 독점하는 걸 막기 위한 ‘스크린 상한제’ 도입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대로 가면 안 돼요. 대기업의 매뉴얼대로 대기업이 좋아하는 작품(시나리오)만 갖다 주잖아. 그래야 투자를 받으니까. 만드는 사람도 투자하는 사람도 다양한 안목으로 영화를 선택하는 게 필요해요. 일반 생태계랑 똑같아요. 다양해야 살아요. 작은 영화부터 대작까지 골고루 분포되고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나와야 산업적으로 사는 거지. (그리고) 급한 대로 스크린 상한제를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영화 산업이 살아요.”

 

한국 영화의 어려움 속에서도 정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대해선 자신감을 보였다. 영화의 개봉 전에 초조함은 없다는 그는 “(흥행은 걱정한다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지. 이번 영화는 될 거기 때문에”라고 했다. 끝으로 관객들에게 전할 메시지가 있느냐고 묻자 정 감독은 “메시지는 관객들이 찾으면 되는 것”이라며 “이 영화 재미있게 봤으면 좋겠어요. 공감하고 아파하고”라고 말했다.


엄형준 선임기자 ti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