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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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돌 풍월당과 독일 ‘궁정가수’ 칭호 받은 베이스 연광철이 손잡고 선보인 ‘고향의 봄’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3일 오전 11시쯤,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자리한 클래식 음반 매장 ‘풍월당’ 5층 강의실. 고요한 공간에 1926년 만들어진 가곡 ‘고향의 봄’(홍난파 시, 이원수 곡)이 아무런 반주 없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독일어권 성악가 최고 영예인 ‘카머젱거(Kammersanger·궁정가수)’ 호칭을 받은 세계 최정상급 성악가 연광철(58·베이스)의 첫 한국 가곡 음반 ‘고향의 봄’에 담긴 마지막 곡이다. 연광철이 묵직하고 깊이 있는 목소리로 담담하게 들려주는데 뭉클하고 가슴이 저렸다. 감은 두 눈도 곧 축축해졌다.    

성악가 연광철이 3일 서울 강남구 풍월당에서 한국 가곡 ‘고향의 봄’ 음반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말하고 있다. 왼쪽부터 피아니스트 신미정, 연광철, 풍월당 박종호 대표. 뉴시스

이어진 음반 발매 기념 간담회에서 연광철은 “30년 동안 외국에서 활동하며 그들의 작품과 문화를  잘 이해하고 해석해 그들(외국인들) 정서에 맞는 감동적인 노래를 불러주려고 노력했지만 난 어차피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며 “한국 가곡은 온전히 저의 것을 부르는 거 같아 좋았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가곡의) 모든 단어와 늬앙스, 전체적인 맥락, 여러 해석이 가능한 얘기들을 제 나름대로 해석해 불러도 듣는 분들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음반이 나온 데는 클래식 음반매장으로 출발해 국내 클래식 애호가들의 사랑방이자 오아시스 같은 문화 마당으로 자리잡은 지 20돌을 맞이한 ‘풍월당’의 역할이 컸다. 한국 가곡이 1990년대 들어 인기가 식고 점점 잊혀져가던 점을 안타까워하던 풍월당 박종호(63) 대표가 가곡 부활을 위해 연광철과 손잡은 것이다. 우리 시와 서양 음악이 결합된 가곡은 1920∼80년대 인기를 끌었으나 90년대 들어 시들면서 특히 젊은 세대에선 잊혀지다시피 했다.   

 

성악가 연광철(베이스)

박 대표는 “공급이 없기 때문에 수요가 없는 것이다. 한국적 정체성이 담긴 가곡을 누군가 적극 알려야 되지 않을까 해서 이 음반을 만들었다”며 ”서양(클래식) 음악이 들어온 지 150년 됐는데 내세울 만한 게 있나. 뛰어난 연주자들이 나왔지만 서양 음악을 하는 것뿐”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 클래식’이라고 하는 건 모순이고 어떤 면에선 부끄럽기도 하다”며 “한국 정서를 담은 건(클래식 음악은) 우리 가곡이다. 리트(독일 가곡)에 비해서도 수준이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박 대표의 뜻에 공감한 풍월당 회원 200여명이 십시일반 기금을 모아 제작비가 마련됐고, 풍월당은 최초로 자체 음반을 제작할 수 있었다. 유럽무대로 활동하며 피아노 듀오(‘신박듀오’)로 유명한 피아니스트 신미정(40)이 반주를 맡았다. 

 

풍월당 박종호 대표

신미정은 “유럽 가곡과 달리 한국 가곡은 제가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시어 하나 하나가 어떤 감정일지 느껴지고 다가오는 뭉클함이 있다”며 “이번 음반 작업 과정이 선물과도 같은 시간이었다”고 했다.

 

이날 음원과 함께 전 세계 동시 발매된 음반에는 ‘비목’, ‘청산에 살리라’, ‘그대 있음에’, ‘내 마음’, ‘옛 동산에 올라’, ‘그집 앞’, ‘진달래꽃’, ‘고향의 봄’ 등 우리의 심금을 울린 대표적인 명곡 16곡과 주목받는 작곡가 김택수(43)에게 위촉한 신작 ‘산 속에서’(나희덕 시), ‘산복도로’(황경민 시) 2곡이 담겼다. 

 

얼마 전 작고한 박서보 화백의 단색화 ‘묘법 No.980308’을 박서보재단으로 후원받아 만든 음반 표지도 눈에 띈다.

 

수록된 18곡의 가사는 영어, 일어, 독일어 3개 국어로 번역해 음반에 함께 담았다. 정새벽(영어), 요시카와 나기(일본어), 박술(독일어) 전문 번역가가 우리 시의 독특한 정서와 아름다움을 각 언어권 독자들이 이해하고 느낄 수 있도록 옮겨냈다. 다음달 3일 서울 예술의전당 무대에서 연광철이 직접 들려주는 ‘고향의 봄’을 감상할 수 있다. 


이강은 선임기자 ke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