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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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인천 항미단길을 아시나요

우리나라 철도 탄생역이자 수도권 전철 1호선 종착지인 인천역. 주변으로 1883년 외국에 의해 강제로 항구를 열어 조성된 140년 역사의 개항장, 지역의 대표적 관광지로 꼽히는 차이나타운, 야트막한 응봉산 정상에 자리한 국내 첫 서구식 자유공원, 세계 최대 야외 벽화로 기네스북에 오른 사일로 등 지루할 틈이 없을 정도로 가 볼 곳들이 적지 않다. 이 같은 익숙한 레퍼토리 이외에도 숨은 매력이 넘쳐난다.

‘항미단(港美團)길을 아시나요.’ 인천역에서 중구 해안동 아트플랫폼 로터리로 이어지는 200m 남짓한 곳이다. 그 역사는 19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근에 자리했던 공장에서 전철역과 항구로 각종 물류를 실어나르기 위해 놓였다. 지금은 사라진 인천부두와 가까워 관련 업종으로 매일의 삶을 이어 간 상인도 많았다. 배에서 쓰는 노·닻·키 등 기구를 파는 선구점, 일일이 손으로 바늘을 옮겨 가며 짜던 그물가게 그리고 이들의 끼니를 책임졌던 밥집까지.

강승훈 사회2부 차장

언제까지 활기찰 것만 같던 이곳도 시간이 흘러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일자리를 쫓아 전국에서 흘러든 사람들이 빠르게 떠나가며 거리는 활력마저 잃었다. 다만 평생의 터전을 일궈 온 몇몇 가게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다 4년 전부터 신선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외지의 예술가들이 하나둘 둥지를 틀었고 그물거리 토박이들과 한마음으로 새 숨을 불어넣기 시작한 것이다. 애틋하게 지키고 진정으로 가꾸려는 노력은 그렇게 빛을 발했다.

차츰 생기를 되찾으며 새로운 이름도 붙었다. 당연히 현지 구성원들이 모두 머리를 맞댄 결과물이다. ‘개항장의 아름다운 길’에는 20여곳의 상점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가장 끝자락에 자리한 ‘고향(古香)’에서는 지긋한 나이의 주인장처럼 색 바랜 LP판을 비롯해 필름 카메라 등 추억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골동품들과 만나게 된다.

몰라보게 밝아진 항미단길에 역사 중심의 스토리텔링을 부여하며 지금 모습으로 거듭나게 한 일등공신으로는 도자기공방 민의 조은경 대표가 꼽힌다. 중구에서 나고 자란 그는 2019년 말 무작정 돌아와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당시 우연히 들른 고향의 초라해진 모습에 큰 상실감을 느꼈고, 마음 한편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가 살겠다는 바람이 더해진 결정이었다. 이곳을 살리겠다는 간절함은 터줏대감 격인 상인들에게 전해졌고 속속 합류로 이뤄졌다. 젊은 작가들도 힘을 보탰다.

한때 서울에는 각 동네를 상징하며 발길을 끌어모으는 명물거리들이 있었다. 이국적인 정취를 풍겨내는 가게들이 넘치는 이태원 경리단길,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각광받은 신사동 가로수길, 서울대학교를 상징하는 글자 ‘샤’와 기존의 유명 상권이 더해진 샤로수길…. 이들의 공통점은 ‘힙(hip)하다’는 단어로 정리된다. 대략 ‘개성적이면서도 세련됐다’는 의미로 풀린다.

이제 항미단길은 여러 세대가 공존하는 장소로 거듭났다. 명성라사·유신어망·서산그물·가온가죽공방·원트모어·앵커1883 등등. 위에 나열한 ‘힙’한 핫플레이스는 결이 다르다고 본다. 과거를 기억하고 지키면서 현재를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 그 자체다.개항장의 아름답고 화려한 내일을 열어 가는 그들의 열정은 무엇보다 뜨겁다.


강승훈 사회2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