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인간도 피해 갈 수 없는 것, 바로 죽음이다.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내려진 운명이라는 사실은 그러나 내게 별다른 위안이 되지 않았다. 겪은 사람은 너무나 많은데,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이 나를 오히려 더 두렵게 했다. 어린 시절 나는 언제, 어떤 형태로, 불쑥 찾아올지 모를 그 미지의 소멸이 너무나 두려워 한동안 밤마다 울었다. 부모님은 어린 딸이 죽음을 생각하며 질질 짜는 모습에 당황스러워하다가, 신기해하다가, 이내 걱정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그때 내가 왜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확실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죽음을 이전과는 다르게 감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3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그날 갑작스럽게 아빠를 잃었다. 죽음에 대한 나의 공포는 가까운 사람의 실질적인 죽음으로 인해 더 가산되진 않았다. 그저 미지였기에 공포였던 죽음이 이토록이나 가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비현실적으로 실감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도 종종, 구급차에 누워 인공호흡기로 잠시 삶을 지탱하는 아빠를 바라보는 ‘나’를 본다. 유체 이탈한 기분으로. 그런 나에게 누군가가 말했다. “너의 애도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몰라.” 사람은 왜 죽어야 하나, 애도는 어떻게 해야 하나, 는 그렇게 내 인생의 화두로 덜컥 남겨졌다.
‘물포자(물리포기자)’인 내게 죽음에 대한 위로를 건넨 건 뜻밖에도 물리였다. “죽음이란 원자의 소멸이 아니라 원자의 재배열이다. 내가 죽어도 내 몸을 이루는 원자들은 흩어져 다른 것의 일부가 된다.” 물리학자 김상욱 교수가 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에서 이 문장을 발견하곤 동공이 흔들렸다. 최근 인터뷰로 그를 만날 기회가 있어 관련해서 더 물었다.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우주를 관찰해보면 살아 있는 건 거의 없어요. 지구에서조차 생명은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아요. 지구의 대부분은 흙이죠. 그러니까, 죽어있는 상태가 더 보편적인 거예요. 100여년 살다가는 인간은, 우주의 나이로 봤을 땐 정말 눈 깜짝할 시간에 생명이라는 특별한 상태로 있다가 죽음이라는 자연스러운 상태로 돌아가는 거죠.”
과학이 가닿지 않는 정신의 세계, 그러니까 ‘철학적인 죽음’에 대해선 여전히 물음표가 남았으나 그럼에도 자연의 이치를 알고 바라보는 ‘생물학적인 죽음’은 전보다 덜 무섭게 다가왔다. 게다가 생명이라는 것이 아주 드문 현상이라면, 우리 모두는 특별한 존재 아닌가. 김상욱 교수는 그래서 죽음보다, “우리가 왜 살게 되었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했다.
죽음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해준 김상욱 교수와의 만남 며칠 후, 애도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는 사람을 만났다. 지난해 ‘D.P.’로 백상예술대상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라고 말했던 배우 조현철이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건넨 수상소감에서 그는 안타깝게 떠난 죽음들을 호명하며 지금도 우리 곁에 있다고, 그들을 기억해내기도 했다. 그리고 1년. 놀랍게도 그가 연출로 들고나온 ‘너와 나’엔 존재 양식은 변했지만, 그럼에도 어딘가에 있을 존재들이 가득하다.
‘너와 나’는 제주도 수학여행을 앞둔 안산에 사는 두 여고생의 하루를 따라가는 영화다. 짐작하겠지만, 세월호를 그린다. 시간과 함께 흐릿해지고 있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이야기를 관객에게 들려주기 위해 적절한 화법을 윤리적으로 고심한 흔적이 영화엔 가득하다. 영화는 못다 한 말을 전하기 위해 죽은 자와 산 자의 시간을 중첩시키며 달려나간다. 이런 애도도 가능하구나. “슬픔은 상실에 대한 반응이고, 애도는 이 슬픔을 처리하는 방식”이라고 말한 도리언 리더는 ‘우리는 왜 우울할까’에서 슬픔에 접근할 수 있는 작업으로서 예술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나는 ‘너와 나’가 그 증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창작자가 슬픔을 다루는 방법을 보며, 아직 끝내지 못한 나의 숙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