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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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토 前 수장 "러 점령지 뺀 우크라 먼저 나토 가입시켜야"

덴마크 출신 라스무센 전 나토 사무총장 주장
"전에도 서독부터 가입… 통일 후 동독에 적용"

우크라이나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되 현재 러시아에 의해 점령된 우크라이나 영토는 나토 조약 제5조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자는 주장이 제기돼 눈길을 끈다. 회원국 중 어느 한 나라에 대한 공격은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반격한다는 내용의 5조는 나토의 핵심이다. 흔히 ‘원포올, 올포원’(one-for-all, all-for-one)으로 불린다.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 전 나토 사무총장. 게티이미지 제공

11일(현지시간)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 전 나토 사무총장은 최근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가입시키되 러시아군이 점령 중인 영토는 나토의 방어 대상에 빼자는 취지의 제안을 내놓았다. 현재 70세인 라스무센은 덴마크 총리(2001∼2009년 재임)를 지낸 뒤 나토 사무총장에 뽑혀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나토를 이끈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9년 출범한 나토는 2024년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창립 75주년 기념행사를 열 예정이다. 현재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전후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가 최대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우크라이나는 앞서 나토 가입을 신청했으나 러시아를 자극할 가능성을 우려한 독일, 프랑스 등의 반대에 부딪쳐 불발에 그친 바 있다.

 

현재 나토 회원국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크라이나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이는 경우 핵무기 보유국인 러시아와 전쟁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토 조약 5조가 회원국 중 어느 한 나라가 공격을 받는 경우 전체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해 반격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곧 제3차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과 만나 악수하는 아네르스 포그 라스무센 전 나토 사무총장. 라스무센 전 총장 개인 홈페이지 캡처

하지만 라스무센은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우크라이나 영토 가운데 이미 러시아에 점령된 땅은 나토 조약 5조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하면 된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2014년 크름(크림)반도를 강탈한 데 이어 2022년 2월 전면전 발발 이후로는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은 물론 남부의 자포리자, 헤르손 지역을 빼앗은 상태다.

 

라스무센은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영토를 나토의 방어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러시아·나토 간 분쟁의 위협이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만 이 경우 러시아의 불법 침략을 사실상 묵인하는 결과가 될 것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당장 우크라이나가 과연 이런 방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회의론이 제기된다.

 

하지만 라스무센은 이미 빼앗긴 우크라이나 영토를 러시아에 그냥 양도하자는 얘기가 결코 아니라는 입장이다. 현재 우크라이나의 주권이 미치는 지역부터 우선 나토의 보장 아래에 두자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다음 우크라이나군이 동부와 남부의 러시아 점령지로 진격하는 것을 자유롭게 허용하면 된다는 뜻이다. 러시아 입장에선 나토와의 전면전을 각오하지 않는 한 우크라이나 본토에 대한 미사일 공격 등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 라스무센의 주장이다.

 

11일(현지시간) 우크라이나군의 한 여성 대원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동료들을 추모하며 오열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라스무센은 독일이 나토 회원국으로 가입한 경위를 근거로 제시했다. 독일은 1945년 2차대전 패전 후 전범국이란 이유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현 러시아) 4개국에 의해 분할 점령됐다.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지는 서로 합쳐져 서독이 되었고 소련 점령지엔 그대로 동독이 들어섰다. 1955년 서독이 나토에 가입할 당시 나토는 동독 지역에 관해선 아무런 보장을 하지 않았다. 1990년 동서독이 통일되면서 옛 동독 지역도 결국 나토의 방어 대상으로 편입됐다.

 

바로 이 점을 들어 라스무센은 현재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땅은 일단 나토의 방어 대상에서 제외하되, 향후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실지(失地)를 회복하는 경우 그때 나토 조약 5조의 적용을 받는 영토로 규정해도 된다는 주장을 편 셈이다.

 

다만 일부 외신은 “라스무센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거론하며 과거 동서독의 사례를 든 것이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겠다”는 회의적 입장을 밝혔다. 이는 우크라이나가 과거 동서독이나 지금의 남북한처럼 둘로 분단됐음을 전제한 해법인데, 과연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겠느냐는 것이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