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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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습생 ‘노동자성’ 인정·부처간 협업… 안전 사각지대 없애야” [연중기획-안전이 생명이다]

직업계고 실습생 비극 방지하려면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 안 돼
중대 사고에도 산재처리에 어려움
업체·학교서 ‘쉬쉬’ 요구하는 경우도
사고 우려에 참여 학생은 점점 줄어

근로여건 열악 중소기업서 더 심각
취업한 40%가 1년 내 퇴사 ‘악순환’
현장실사·지원 강화해도 死角 여전
근무환경 개선·철저한 안전교육을

‘삑, 삑, 삑.’ 

 

지난 9일 충남 천안시 전기자동차 부품생산 기업인 유진플랫폼의 작업장. 정전기 방지용 작업복인 제전복을 입은 최태영(18)군이 스캐너를 들고 손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스캐너로 부품 자재를 확인하고 있다는 최군은 “사람이 하나씩 확인할 수 없기에 스캐너를 이용하고 있다”고 했다. 

 

노란색 줄을 따라 작업장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보니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는 홍다혜(18)양이 보인다. 홍양은 기판에 설치된 부품의 이상 여부를 설비로 검사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최군과 홍양은 충남 공주마이스터고등학교 3학년생이다. 이들 전공은 구멍에 부품을 삽입하지 않고 인쇄회로기판 표면에 부품을 부착시키는 표면실장기술(表面實裝技術·SMT)로 지난달부터 유진플랫폼에서 현장실습을 하고 있다. 

 

◆반복되는 비극 언제까지

 

전국 특성화고·마이스터고·일반고 직업반 등 직업계고 3학년생의 현장실습 시간이 돌아왔다.

 

현장실습은 졸업 후 곧바로 취업을 원하는 직업계고 학생이 산업현장에서 직무경험을 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임에도 참여 학생 숫자가 줄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올해에는 전체 7만명가량의 직업계고 3학년생 중 3분의 1도 안 되는 2만명만 현장실습에 참가한 것으로 추산된다. 대학 진학, 수시채용과 같은 기업의 채용방식 변화도 있지만 안전 우려가 여전하기 때문이다.

 

15일 더불어민주당 서동용 의원이 교육부에서 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직업계고 현장실습장에서 안전사고 53건이 발생했다. 2018년 3건에서 2019년 8건, 2020년 6건, 2021년 14건으로 늘더니 지난해엔 22건으로 57.1%나 증가했다.

 

사고 처리 내역을 살펴보면 기계류를 다루는 공업계열 실습장에서 산업재해(산재) 발생빈도가 높다. 지난해 직업계고 현장실습 중 사고로 산업재해 처리된 11건 가운데 5건이 가공 실습 중 손가락 끼임이나 압착, 기물 운반 중 허벅지 찔림과 같은 공업계열 실습장에서 발생했다. 

 

지난 9일 충남 아산시 소재 유진플랫폼에서 현장실습생인 홍다혜양이 모니터를 보며 부품의 이상 여부를 검사하고 있다. 천안=이민경 기자

현장실습장 안전사고의 주원인으로는 작업장의 미흡한 안전조치와 사업주의 무리한 업무요구가 꼽힌다. 

 

2017년 11월 제주에서 숨진 현장실습생 이민호군은 생수 공장 측의 미흡한 안전조치와 프레스기 오작동 등이 주된 사망원인이었다. 2021년 10월 전남 여수 요트장에서는 1인 실습생 홍정운군이 잠수자격증이 없음에도 자신의 체격, 체중에 맞지 않는 납 벨트를 입고 조개, 따개비 제거 작업을 하다가 물에 빠져 숨졌다. 

 

안전사고 외에도 업주 측의 강압에 의한 부조리로 현장실습에 나선 학생이 치유할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한다. 영화 ‘다음 소희’의 실제 모델이기도 한 전북 전주시 통신사 콜센터 실습생 홍수연양이 2017년 1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배경에도 현장실습 5개월 동안 있었던 통신사 측의 무리한 실적요구와 노동착취가 있었다. 

 

당국이 현장실습생이 보다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적극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현장실습 사업장의 노동환경이 열악하고 노동자를 차별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해 무엇보다 양질의 실습장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성화고 학생들 위주로 구성된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특고연)는 4일 기자회견에서 “직업계고 졸업생이 취업하는 사업장은 노동환경이 열악한 경우가 많아 취업생의 40%가 1년 이내에 그만둔다”며 “고졸 채용 규모가 줄고 승진에서 차별받는 것을 알기에 학생들이 진학을 선택하면서 취업률도 점차 줄어드는 추세”라고 했다.

 

일반 근로자와 같은 강도, 시간의 노동을 하고 있지만 현장실습생을 근로기준법상 보호를 받는 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아 중대 안전사고가 반복되고 산재 처리도 잘 안 해준다는 의견이 많다. 현장실습생이 다치면 업체는 “본사 직원이 곧 오니까 다치지 않은 척해달라”고 요구하거나, 학교 역시 향후 취업률에 미칠 영향 등을 걱정해 “일단 참으라”고 요청하는 부조리한 사례가 적지 않다.

 

특고연 관계자는 “현장실습생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해야 한다”며 “교육부는 2017년 고 이민호군 사고 이후 현장실습생들을 학생으로서 보호하기 위해 계약근로자로 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로 인한 부작용이 많다”고 했다. 

 

특성화고등학생권리연합회(특고연)가 지난 4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문화공원에서 현장실습생 등의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특고연 제공

◆교육부·고용부 부처 칸막이 없애야

 

정부는 현장실습장에서 안전사고로 비극이 반복하자 개선책을 내놓고 있다. 

 

교육부는 지난 8월 발표한 ‘중등직업교육 발전방안’을 통해 직업계고 학생이 안전이 보장되는 산업체에서 실습받도록 대상 기업 기준을 고용노동부 위험성 평가 인정 사업장과 연계해 강화하기로 했다. 또 내실 있는 현장 점검을 위해 학교 전담 노무사를 올해 800명에서 내년 1000명으로 확대한다고 했다. 발전방안에는 실습장에서 학생들 안전을 전담하는 ‘기업현장교사’의 하루 지원금을 지난해 2만원에서 올해 3만원으로 인상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정부는 2021년부터 현장실습 기업에 대한 비용 지원을 확대해왔다. 최근엔 현장실습생에 대한 인건비 지원 비율을 30%에서 60%로 확대해 기업의 부담을 더 줄였다.

 

전문가들은 현장실습생과 관련된 교육부와 고용부 등 부처 간 협업을 강화해 현장실습생에게 더욱 안전한 노동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이병훈 중앙대 명예교수(사회학)는 “현장실습생의 취약한 노동 실태는 교육부와 고용부가 서로 행정에 책임지지 못하는 사각지대의 문제”라며 “부처 간 칸막이가 커서 현장실습 문제가 계속 이어지고 있기에 실질적인 협업을 통해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9일 충남 천안시 소재 유진플랫폼에서 현장실습생인 최태영군이 스캐너로 부품 자재를 확인하고 있다.

현장실습생을 ‘적은 임금으로 기피 업무 등을 시킬 수 있는 아르바이트생’으로 대했던 기업 분위기도 차츰 바뀌는 분위기다.

 

현재 현장실습생을 채용하는 사업장은 산업안전보건공단, 안전협회, 재해예방전문기관 등이 참여하는 사전 현장실사를 받아야 한다. 사망과 장해 사건 등 중대재해가 발생한 사업장은 현장실습에서 아예 제외된다. 

 

유진플랫폼 관계자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실습이기에 안전에 특히 유의하고 있다”며 “위험도가 높은 산업현장은 아니지만 설계마다 안전장치를 설치하고 월 1회 안전 장비 교육을 하는 등의 대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유진플랫폼은 월 1회 안전 장비 교육을 진행하고, 실습생들에게 최저임금 이상의 실습 수당을 지원하는 등 우수한 현장실습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기업 대 중소기업 격차 해소 시급

 

정부가 현장실습생 기업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현장실사를 강화해도 현장에서 사각지대를 없애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안타까운 지적이 나온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현장실습생에 대한 대우, 근무여건, 안전 인식에 격차가 발생하면서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의 중소기업, 지방기업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현재 대기업은 현장실습생을 주기적으로 채용해 장기간 안전교육 등을 통해 인력 충원의 창구로 활용할 수 있는 구조다. 이에 비해 중소기업은 당장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 위해 안전보다는 작업이 우선인 경우가 다반사다.

 

지난 9일 충남 아산시 소재 유진플랫폼에서 현장실습생인 허정무(왼쪽)·박정수군이 모니터를 보며 부품의 이상 여부를 검사하고 있다. 천안=이민경 기자

이에 따라 근무 환경이 좋지 않은 지방 중소기업에 채용된 현장실습생은 통상 스펙을 쌓은 뒤 수도권으로 이직하려는 사례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정부 지원이 확대됐어도 장기근속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많지 않다”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지방 중소기업은 열악한 노동환경 탓에 현장실습생이 장기 근무를 꺼리게 되고, 중소기업은 현장실습생을 장기간 근무할 수 있는 인력으로 인식하지 못하면서 안전문제 등에 대해선 관심이 소홀한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셈이다. 

 

다른 중소기업 관계자는 “오래 같이 일한 인력이란 생각이 들지 않아 관심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잠시 지나쳐가는 인력이라는 편견 때문에 실무교육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런 분위기가 안전사고와 직결된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업무 숙련도가 낮으면 사고 위험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중견기업 관계자는 “현장실습생은 보통 숙련도나 안전에 대한 경각심이 숙련공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 안전사고 발생 위험이 더 크다”며 “현장실습생에 대한 안전사고 교육과 안전시설 개선 등 정부 차원의 제도적인 지원 외에도 중소기업 근무여건 등을 개선해 일체감을 키워주는 것도 안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천안=글·사진 이민경 기자, 김범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