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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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첩된 기와지붕 군집美·자연과 교감하는 관계美 돋보여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23) 국립청주박물관

현대건축 거장 김수근 ‘전통의 창조’
단일 박물관 아닌 여러 건물로 지어
기왓고랑과 줄눈으로 군집미 강조

유리벽으로 중정을 뒷마당처럼 봐
전시물도 외따로이 없이 관계 맺어
관람객 소장품 가치 느끼게 만들어

우리나라에는 총 909개의 박물관이 있다. 그중 국가에서 설립한(국립·國立) 박물관은 53개다(‘2022 전국 문화기반시설 총람 기준’,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경주박물관(1945년 10월7일)을 시작으로 국립박물관 건립은 일찍부터 지역 안배가 이루어져 왔는데 그 배경에는 박정희 정권 말 바뀐 정책이 있었다. 당시 정부는 갑작스러운 재난에 대응하기 위해 문화유산을 지방에 분산·수장하고 지역 문화의 전시·연구를 통해 박물관의 지역적 특색을 살리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해당 계획의 일환으로 1975년에 경주와 부여박물관이 국립으로 승격됐고 광주, 진주, 청주에 국립박물관 건립 프로젝트가 착수됐다. 경주와 부여가 신라와 백제 문화권을 대변한다면 광주, 진주, 청주는 호남, 가야, 충청 문화권을 대표한다. ‘중원문화권’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충청문화권은 삼한 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고 삼국 시대에는 백제, 신라, 고구려가 번갈아 통치했던 지역이다. 그래서 삼국의 문화가 융합된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국립청주박물관의 전시물, 전시실, 건축물 그리고 주변 자연이 만들어내는 군집미와 관계미는 우리네 산사(山寺)나 한옥이 밀집된 동네 풍경 그리고 안방에서 바라보는 뒷마당을 떠오르게 한다.

지역적 특색을 살리기 위해 지방에 국립박물관이 건립됐지만 준공된 박물관은 대부분 기와지붕을 얹고 있는 거대한 한옥 형태다. 진주와 청주의 국립박물관을 설계한 김수근에 따르면 기와지붕을 사용하라는 문화공보부의 지침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김수근은 해당 지침을 어느 정도 지키면서도 대놓고 전통 건축을 모방하지 않기 위해 고심했다고 한다.

김수근이 전통 건축에서 주목한 건 기와지붕이나 목구조와 같은 건물의 형태가 아니었다. 그는 사용자들에게 친밀감을 주는 적절한 휴먼스케일(human scale), 건물 안에서 이동하거나 밖을 조망할 때 느끼는 체험, 우연히 일어나는 다양한 행위를 받아낼 수 있는 여유를 전통 건축의 특징으로 봤다. 그리고 이를 현대 건축으로 구현하는 것을 ‘전통의 창조’라고 생각했다.

국립청주박물관은 우암산 동쪽 기슭에 들어서 있다. 김수근은 대지의 지형에 맞춰 여러 개의 건물을 잘게 나누고 통로와 로비로 연결했다. 사실 박물관이라는 기능적 측면에서 보면 단일 건물을 커다랗게 짓는 방식이 합리적이다. 전시 동선을 풀어내거나 필요에 따라 전시실을 재구성하기도 쉽고 기와지붕을 통한 전통적인 조형미를 확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춘명의 설계로 1978년에 개장한 국립광주박물관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김수근에게 기와지붕을 올린 커다란 단일 건물은 앞서 언급한 ‘전통의 창조’를 구현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경사가 있는 땅에 커다란 단일 건물을 지으려면 기존 지형을 많이 변형해야 했다. 김수근이 찾아낸 방식은 여러 건물이 중첩되면서 만들어내는 ‘군집미(群集美)’였다.

국립청주박물관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정문에 들어서면 박물관 입구로 향하는 살짝 꺾인 계단이 나온다. 그리고 낮은 단에 배치된 건물 지붕 위에 그 윗단에 배치된 건물의 지붕이 중첩된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치 산속에 있는 사찰을 오르면서 보는 풍경과 비슷하다.

반대로 가장 높은 휴식동산에서 내려다보면 박물관 동쪽에 있는 낙가산과 선도산의 능선을 따라 나란히 펼쳐진 지붕선이 보인다. 춤추는 산등성과 한옥을 닮은 지붕이 만들어내는 율동이 참 잘 어울리는 장면이다. 더불어 높이가 다른 기왓고랑이 올려진 여러 지붕이 서로 포개지면서 북촌과 같은 한옥이 밀집된 동네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한옥의 기와지붕에서 기왓고랑은 빗물이 바닥으로 흘러내릴 수 있도록 수키와와 수키와 사이에 만들어진다. 그런데 국립청주박물관의 지붕에는 기와가 올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기왓고랑이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김수근은 기왓고랑을 닮은 요소를 지붕 위에 설치해 비슷한 역할과 함께 리듬감을 부여했다.

기왓고랑과 더불어 국립청주박물관의 군집미를 강조하는 요소는 건물 몸체에 새겨진 수평 방향의 줄눈이다. 줄눈은 남북으로 긴 건물 방향에 맞춰 박물관을 수평으로 퍼뜨려 보이도록 한다. 이를 통해 건물이 주변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이런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해 설계자는 옹벽에도 줄눈을 만들어 연속성을 유지했다.

국립청주박물관 바깥에서 여러 건물이 중첩되면서 만들어내는 군집미를 느낄 수 있다면 안에서는 여러 요소가 얽히면서 이루는 ‘관계미(關係美)’를 확인할 수 있다. 박물관 내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첫 번째 관계는 건물과 주변 자연의 만남이다. 김수근은 관람객이 주변 자연과 함께 전시물과 건물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구체적으로 생선 가시처럼 배치된 건물 사이로 자연이 스며들게 함으로써 내외부가 모호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이를 위해 중정에 면한 벽을 큰 유리로 처리해 외부에 놓인 다양한 식물과 석축 그리고 석조물을 내부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마치 전통 한옥의 안방에서 뒷마당을 바라보는 듯하다.

두 번째 관계는 고고(考古)1, 2실, 미술실, 금관실로 나뉜 상설전시실 간에서 일어난다. 국립청주박물관은 2022년에 상설전시실을 개편하면서 ‘금속 문화’를 큰 주제로 설정했다.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직지’의 고향이 청주이기 때문이다. 4개의 상설전시실은 밝게 연출된 고고1, 2실과 어둡게 처리된 미술실 및 금관실로 나뉘어 대조를 이룬다. 하지만 금속 출현 전후의 인류 삶과 금속을 통해 찬란했던 문화를 설명하는 스토리라인으로 서로 엮여 있다.

전시실을 연결하는 통로에서 바라본 건물 밖 중정과 석인상.

각 전시실 내 전시물들도 외따로이 놓여 있지 않고 다른 전시물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고고실의 한쪽 벽면을 채우고 있는 전시물들은 관람자가 어떻게 연결하느냐에 따라 각각 다른 관련성을 이룬다. 고고2실에서는 전시 벽면 맞은편에 책장을 배치해 관람객이 읽는 책의 내용과 바라보는 전시물이 서로 의미를 갖도록 했다. 미술실에 전시된 불교와 생활 금속 공예품들은 관람객이 바라보는 위치에 따라 중첩되며 여러 조합을 이룬다. 심지어 전시실 한쪽에 마련된 마루에 앉아 창 너머 성보문화재를 내려다보면 다른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상설전시실의 클라이맥스는 경주시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과 금허리띠가 전시돼 있는 금관실이다. 유리 상자 안에 있는 금관과 금허리띠는 어두운 전시실에서 조명을 받아 공중에 떠 있는 듯하다. 금관과 금허리띠는 떨어져 있는데 그래서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두 전시물이 하나의 형상을 이루기도 하고 금관을 쓰고 금허리띠를 두른 왕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한다.

국립청주박물관에서 전시물과 전시실, 각 건물과 주변 자연은 어느 하나도 떨어뜨려서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요소들이 이루는 군집과 관계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은 결국 박물관이 단순히 소장품을 보여 주는 곳이 아니라 관람객들이 소장품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최적의 분위기와 공간을 제공하는 장소라는 변화한 역할을 일깨워 준다.


도시건축작가 방승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