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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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銀 폐쇄·달러화 도입 공약… 아르헨 ‘충격요법’ 택했다

경제난 아르헨 대통령에 ‘극우 포퓰리스트’
자유전진당 밀레이 56% 득표
‘퍼주기 복지’ 집권좌파에 반기
경제실정 신음 국민 선택 받아

최악 인플레 등 경제위기 상황 속
재정적자 해결 긴축정책도 내세워
장기 매매 허용 등 파격 공약도 제시
반공·반중·친미·친이스라엘 노선
남미 외교지형에도 대격변 예고

극심한 경제난 속에 치러진 아르헨티나 대선에서 법정화폐 달러화 도입, 중앙은행 폐지 등 과격한 자유주의 정책을 내세운 극우 성향 후보가 당선됐다. 물가상승률이 140%대를 넘기며 32년 만의 최악 인플레이션에 직면한 아르헨티나가 수십년간 고수해 온 좌파 포퓰리즘 대신 ‘우향우’ 충격요법을 선택하면서 아르헨티나는 물론 남미 전체의 정치·경제 지형에 격변이 예상된다.

 

아르헨티나 내무부 중앙선거관리국에 따르면 19일(현지시간) 치러진 대선 결선투표에서 자유전진당(LLA) 소속 하비에르 밀레이(53) 후보가 약 56% 대 44% 득표율로 현역 경제부장관이자 여당 후보 세르히오 마사(51)를 따돌렸다. 경제학자 출신 초선의원인 밀레이는 지난달 본선 투표에서는 2위에 그쳤지만, 결선에서 역전에 성공했다. 밀레이는 “제한된 정부, 사유 재산 존중, 자유 무역,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며 “오늘 아르헨티나 국민을 빈곤하게 만드는 만능 국가 모델은 종말을 맞이했다”고 당선 소감을 밝혔다. 마사 후보는 “그에게 축하를 전했다”며 결과에 승복했다.

대권 잡은 ‘아르헨티나 트럼프’ 극심한 경제난 속에 19일(현지시간) 치러진 아르헨티나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자유전진당 소속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당사에서 당선 소감을 밝히고 있다. 좌파 페론주의에 대한 유권자들의 피로감이 누적된 상태에서 아르헨티나 페소화를 달러로 대체하는 내용 등 급진적 자유주의 정책을 내세운 그의 당선으로 아르헨티나의 대내외 정책에 격변이 예상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로이터연합뉴스

자칭 ‘무정부주의 자유주의자’인 밀레이는 무분별하게 페소화를 찍어낸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이 제 기능을 상실했다며 이를 폐지하자고 주장한다. 또 가치가 폭락한 페소화를 포기하고 미국 달러를 통화로 사용하겠다고 공약했다. 재정적자 해결을 위해 국내총생산(GDP)의 40%였던 공공지출을 15%까지 삭감하는 강력한 긴축 정책도 내세웠다.

 

그가 주장하는 과격한 개혁은 아르헨티나의 현대 정치사를 지배했던 페론주의와 정반대의 노선을 걷는다. 페론주의는 1946년 최초 집권한 후안 도밍고 페론 전 대통령을 계승한 광범위한 무상 복지, 산업 국유화, 외국 자본 배척 등 좌파 포퓰리즘 정책을 일컫는다.

 

남미에서 두 번째로 큰 시장으로 1970년대까지 경제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페론주의 정당 집권 후 수십년간 경제 침체에 시달렸다. 중앙은행이 정부 과잉 지출을 메꾸기 위해 페소화를 찍어내면서 화폐 가치가 급락했고, 아르헨티나는 1956년 국제통화기금(IMF) 가입 이래 구제금융을 22차례나 받아야 했다. 특히 지난달 아르헨티나의 소비자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142.7% 폭등해 20년 만에 최악의 경제 상황을 맞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민 빈곤율도 올해 상반기 40%를 돌파했다.

 

이런 배경에서 치러진 대선 과정에서 밀레이는 전기톱을 들고 “기존 정치를 쓸어버리겠다”며 페론주의 좌파와 우파 야당연합까지 심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유지상주의를 내세운 총기 규제 철폐, 장기 매매 허용 등 파격 공약으로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심각한 경제난으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반감이 높아진 유권자들의 표심은 정권 교체 쪽으로 향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밀레이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많은 아르헨티나인들은 변화에 대한 절박함을 느꼈다”고 분석했다.

 

밀레이는 지난 8월 대선 예비선거(PASO)에서 깜짝 1위를 차지하며 주목을 받았다. PASO는 정당별 본선 최종 후보가 가려지는 전국 선거로, 당시 밀레이를 유일 후보로 내세운 자유전진당이 대표적인 여야 세력이던 좌파 여당과 우파 연합을 제치고 30%에 가까운 득표율을 얻었다. 현지 언론은 “아르헨티나 정치의 지각변동”, “페론주의의 역사적 몰락”이라고 평가했다.

 

밀레이의 ‘사이다’ 언행이 지지만을 불러온 것은 아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더러운 좌파”, 기후변화를 “사회주의 사기극”이라고 주장해 논란에 휩싸였고 이는 중도층의 표심 이탈로도 이어졌다. 밀레이는 지난달 치러진 1차 투표에서 마사 후보에 이어 2위로 밀리자 중도층 표심 흡수를 위해 일부 발언을 철회하기도 했다.

 

다음달 10일 4년 임기 대통령에 취임하는 밀레이가 시행할 정책의 결과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앞서 남미 에콰도르와 엘살바도르가 인플레이션 탈출을 위해 경제를 달러화한 적이 있지만, 아르헨티나급 규모의 국가가 달러화를 통해 자국 통화 정책의 주도권을 미국에 넘긴 전례는 없기 때문이다.

 

달러를 법정화폐로 채택하면 중앙은행은 더 이상 페소화를 찍어낼 수 없고, 인플레이션의 주요 동인이 제거되면서 물가 상승이 억제된다. 실제로 에콰도르는 2000년 달러화 도입으로 연평균 40%에 달하던 인플레이션이 2003년 3%대까지 안정되는 효과를 봤다.

밀레이는 대통령이 되면 자신의 경제 책사인 아르헨티나 거시경제센터(CEMA)대학 에밀리오 오캄포 교수를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해 폐쇄 임무를 맡기겠다고도 밝혔다.

 

하지만 달러화에 마냥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국 통화정책을 포기하고 미국 경제정책에 의존하게 될 뿐 아니라, 달러 강세 때는 수출이 고스란히 타격을 받게 된다.

 

실효성도 문제다. 달러화 전환을 위해서는 중앙은행이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통화를 매입하고, 잠재적인 인출 급증까지 감당할 충분한 달러 보유고를 확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외환보유액보다 약 500억달러가 더 필요하다고 현지 분석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중남미 좌파 정부 물결 ‘핑크 타이드’의 기세도 밀레이의 당선으로 한풀 꺾였다. 2018년 멕시코를 시작으로 잇달아 좌파 정권을 배출한 중남미 국가들은 미·중 갈등 구도 속 중국에 밀착하고, 가자지구에서 전쟁 중인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 수위를 높이는 등 특정 이슈에서 한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밀레이의 당선으로 아르헨티나의 대중국 접근법도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중국은 아르헨티나의 최대 교역국이지만, 밀레이는 후보 시절 미국·이스라엘과의 교역 확대를 선언하면서 “공산당과는 거래하지 않는다”거나 “대선에서 승리하면 중국과의 관계를 끊을 것”이라고 으름장을 놨다.

 

싱크탱크 차이나다이얼로그 남미 책임자 마가렛 마이어스는 “중국은 대선 결과에 관계없이 가능한 모든 형태로 아르헨티나와 교류할 것”이라면서도 밀레이의 승리로 아르헨티나 내 댐 프로젝트, 신규 원전 건설 협상 등의 “재검토가 이뤄질 것은 틀림없다”고 내다봤다. 로이터통신은 말레이의 당선이 세계 곡물, 리튬, 탄화수소 무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윤솔 기자 sol.yu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