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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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잡는다며 정부는 기업 옥죄고… 기업은 용량 줄여 소비자 속이고

최근 각 부처 물가책임관 임명
제품가격 인상 사실상 통제해
기업들 제품용량 줄여 ‘눈속임’
보여주기 행정… 소비자 부담 가중

김주현, 8대 금융지주회장단과 간담회
‘횡재세’ 언급… “국민 요구 수준 감안”

“물가 오르는 게 전부 기업 탓인가요? 국내 매출은 적자인데도, 가격을 못 올리고 있는 상황이에요. 팔수록 손해라는 걸 설명해도, 정부 측에서는 항상 같은 얘기예요. 올리더라도 지금은 안 된다, 시기를 좀 늦춰달라는 말만 반복해요. 정부가 기업들 모아서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무시하고 올릴 배짱 있는 기업 없습니다. 언제 올려야 하나 눈치만 보고 있는 거예요. 물가 잡는다면서 기업 잡는 꼴이죠.”

정부가 용량 축소 등을 통한 편법 가격인상을 의미하는 '슈링크플레이션' 실태조사를 진행하겠다고 발표한 가운데 19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과자를 고르고 있다. 연합뉴스

최근 정부가 개최한 물가 관련 기업간담회에 참석한 A사 임원의 푸념이다. 그는 “사실상 정부가 제품 가격을 통제하고 있다”며 “반시장주의적 행태”라고 말했다.

정부가 물가 안정을 명분으로 사실상 시장에 개입하며 기업을 옥죄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특히 각 부처 차관들이 식품·수산·급식업계 등 업종별 간담회 형식으로 기업 관계자들을 불러모아 ‘압박’하는 형식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실효성도 미미하다. 기업들은 원가 상승에 따른 적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제품 용량을 축소하는 등 ‘꼼수’를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정부의 보여주기식 물가관리에 기업의 편법이 더해져 소비자 부담만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 기획재정부 등에 따르면 정부는 물가 관리를 위해 최근 각 부처 차관을 물가책임관으로 임명하고, 특별물가안정체계를 가동 중이다. 기재부를 중심으로 교육부, 행정안전부 등 10개 부처가 참여하는 일종의 물가 현장 대응팀이다.

먹거리 물가를 담당하는 농림축산식품부는 28개 품목의 가격 동향을 매일 점검하고 있다. 여기에 수시로 관련 업계의 최고경영자(CEO)나 임원급 관계자를 소집해 간담회를 진행하고 있다. 한훈 농식품부 차관은 지난달 20일과 26일 각각 식품업계, 외식업계 관계자들과 간담회를 열고 사실상 가격 인상 억제를 요청했다. 한 차관은 기업 관계자들에게 “높은 외식물가는 소비자의 지출여력을 낮춰 소비를 감소시키고, 서민경제 부담도 가중한다는 우려가 크다”며 “전사적인 원가 절감을 통해 가격 인상 요인을 최대한 자체 흡수해달라”고 말했다. 가격을 올리는 대신 원가 절감을 하라는 요청이다.

19일 서울 이마트 용산점에서 고객들이 쓱데이 할인행사 마지막 날을 맞아 각종 할인 제품을 구매하고 있다. 뉴시스

정부가 제품 가격 인상에 제동을 건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가공식품 가격 인상이 이어지자 정부는 올해 초부터 식품기업 대표·임원진을 대상으로 물가 안정에 협조해줄 것을 당부했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시기에는 해양수산부도 국산 수산물 소비 촉진 등을 이유로 수산·급식업계 관계자들을 간담회 형식으로 소환하기도 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물가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부에서 CEO들을 불러모으는 것 자체가 기업엔 부담”이라고 말했다.

지난 6월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라면값 발언’ 역시 대표적 가격 개입으로 꼽힌다. 당시 추 부총리는 “국제 밀 가격이 떨어졌으니, 라면값을 내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밀가루 가격이 반영되지 않은 시점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논리”라고 반발했다. 라면값 하락 압박은 제분업계로도 이어졌다. 농식품부는 제분업체 10여곳을 소집해 밀가루 가격 인하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다. 라면값뿐 아니다. 우유값, 소주값 등 가격 인상 소문이 들릴 때마다 정부의 개입이 이어졌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5일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서비스산업 정책간담회를 주재하고 있다. 기획재정부 제공

금융권에 대한 압박도 계속되고 있다. 여러 차례 금융권을 향해 ‘상생금융’을 요청해온 당국은 20일 금융지주회장단과의 간담회를 열고 다시 한 번 ‘체감할 수 있는 정도의 상생금융방안’을 내놓아 달라고 압박했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이날 국내 8대금융지주(KB·신한·우리·하나·NH·BNK·JB·DGB)와의 간담회 자리에서 “자영업자·소상공인 등의 절박한 상황을 고려해 금융회사의 건전성을 해치지 않는 최대한의 범위 내에서 금리부담의 일정수준을 직접적으로 낮춰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8대 은행금융지주회사 및 은행연합회는 논의를 거쳐 자영업자·소상공인 이자부담 경감을 위해 향후 발생할 이자부담의 일부를 경감하는 방식을 적극 검토해 세부안을 연내 발표하기로 했다.

 

김 위원장은 간담회 후 기자들과 만나 ‘상생금융’ 규모와 관련, 국회에서 발의된 ‘횡재세’를 언급하며 “국민들이 요구하는 수준이 어느 정도라는 걸 좀 감안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이 발의한 횡재세 관련 법안에 따르면, 은행은 최대 2조원을 상생금융 기여금으로 내게끔 되어 있다.

 

정부가 기업을 옥죄고 있지만, 실제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 오히려 기업들은 이 같은 정부의 압박에 가격 인상 대신 용량을 줄이는 ‘꼼수’로 대응하고 있다. 이른바 ‘슈링크플레이션’이다. 한 봉지에 5개에서 4개로 줄어든 핫도그 제품, 50g 줄어든 바베큐바 등 소비자를 속이는 제품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그러자 정부는 이달 말까지 슈링크플레이션에 대한 실태조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이 자칫 물가 불안을 더욱 조장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석병훈 이화여자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물가를 억지로 누르면 튀어 오르게 돼 있다”면서 “과거 이명박정부의 가격 개입 사례 평가를 보면, 오히려 정부가 개입한 후에 원래 소비자물가보다 1.6배 더 올랐다”고 지적했다.


세종=안용성 기자, 이도형·이강진·채명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