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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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땅 일본 미야기, 치유의 길 한국 올레를 품다

일본 미야기올레 5번째 무라타코스 지난 11일 개장
지역 관계자 “무라타가 이렇게 주목받은 적 없었어”
동일본 대지진·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등에 큰 피해
‘치유와 상생의 길’ 미야기올레로 발길이 이어지길
세계적 브랜드로 자리잡은 ‘올레’ 트레일 문화 선도

이 길 끝엔 무엇이 기다릴까. 지난 11일 개장한 일본 미야기현 5번째 미야기올레 무라타코스의 첫 인상은 정갈했다. 굽이치는 오솔길을 따라 걷는 동안 바람에 나뭇가지 스치는 소리와 숲의 푸른 색감이 내안을 가득 채웠다. ‘내가 살아있다’는게 폭신하게 깔린 흙을 한걸음한걸음 밟아나가는 이순간 생생하다. 이렇듯 자연에 취해 수시간 걷다보면 결국 풀어헤쳐진 나와 오롯이 마주하게 된다.

 

11일 개장한 일본 미야기올레 무라타 코스를 걷고 있는 참석자들. 뒤로는 산맥 자오연봉이 보인다.

무라타 코스에는 자연과 역사가 어우러져 있다. 13.5㎞ 길 너머에 웅대한 자오연봉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2014년 9월 미야기현 최초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선정된 에도시대 번영을 간직한 창고마을을 발견할수 있다. 서기 123년에 세워졌다는 시라토리 신사에는 수령이 1000년 넘은 것으로 추정되는 거목들이 버티고 있고, 1900년 5월 다이쇼 천황 성혼을 축하하며 만든 아이야마 공원에는 300그루의 벚나무가 있어 벚꽃 절경 명소로 자리 잡았다. 

 

무라타 코스는 사단법인 제주올레 검수를 받으며 미야기현이 3년을 공들인 결과물이다. 길을 찾는 탐사팀 운영만 1년 남짓 걸렸다. 미야기현 관광연맹 호리이 아카네는 “비포장도로 등 올레에 기준이 되는 조건을 충족하는 길을 찾는게 가장 어려웠다”고 전했다. 특히 이날 참가자들에게 호평받은 건 톱밥길이다. 군데군데 바닥에 쓰러진 삼나무·참나무 칩을 깔아 푹신푹신하게 만든 것으로 길을 걷는 사람을 배려한 아이디어다.

 

11일 개장한 일본 미야기올레 무라타 코스를 걷고 있는 참석자들.
11일 개장한 일본 미야기올레 무라타 코스를 걷고 있는 참석자들.

이날 최초로 무라타 코스를 함께 걸은 건 사단법인 제주올레 안은주 대표, 김요섭 주센다이대한민국총영사 등 1000여명의 순례자들이다. 무라타는 올레길이 생기기전엔 관광객 인식이 닿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무라타 코스가 열리며 지역 관계자들은 “무라타가 이렇게 언론에 주목받은 적이 있었나”라며 기뻐했다는 후문이다. 무라타 코스 개장을 계기로 일본우정공사와 협업해 만든 미야기올레 우표도 전국에 배포된다. 올레가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지역에 활기를 불어넣은 것이다.

 

사단법인 제주올레 안은주 대표, 김요섭 주센다이대한민국총영사 등이 11일 일본 미야기현 미야기올레 무라타 코스 개장식에 참석하고 있다.

외빈으로서가 아니라 일부러 자비로 개장식에 참석한 한국인도 있었다. 경기 수원시에 거주하는 주우열(51)씨는 “길을 좋아하기 때문에 왔다”며 “무라타 코스는 센다이역에서 버스로 이동이 가능해 접근성이 좋은 것 같다”고 평가했다. 주씨는 “낙엽이 가득한 숲길을 걷다보니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기대하며 봄에 다시 오고 싶다”며 “한일 관계의 영향과 상관없이, 올레를 통해서 민간 교류가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어 “인생이 그렇듯 완주가 목적이 아니라 올레길을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웠고 행복했다”고 덧붙였다.

 

11일 개장한 일본 미야기올레 무라타 코스를 걷고 있는 참석자들.
11일 개장한 일본 미야기올레 무라타 코스를 걷고 있는 참석자들.

◆상처입은 땅에 깔린 치유의 길

 

미야기올레는 일본 도호쿠 지역이 가진 아픈 역사 때문에 더욱 특별하다. 바다와 산맥, 풍요로운 전원지대까지 자연 혜택을 넘치게 받은 곳이지만, 2011년 3월11일 발생한 진도 9.1 동일본 대지진으로 큰 피해를 보았다. 거대 쓰나미가 지역을 삼키고,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일으켰다. 최근에는 일본 정부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로 인해 한국은 물론 일본내에서도 여론이 좋지 않다. 지진 피해자 가운데 절반 정도인 1만500여명이 미야기현 주민으로 행방불명된 1200여명은 아직도 수색 중에 있다.

 

10일 미야기현 히가시마츠시마시 노비루 우시로자와 노비루 구역사(현 지진피해부흥전승관). 외벽에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로 3.7m까지 수몰됐다는 표식이 붙어있다.
10일 미야기현 히가시마츠시마시 노비루 우시로자와 노비루마을에 2011년 동일본 대지진 피해자 위패를 모신 곳.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수마가 할퀴고 간 흔적을 지난 10일 미야기현 히가시마츠시마시 노비루 우시로자와 노비루역에서 찾을 수 있었다. 역 주변 노비루 마을은 지진 당시 피해가 심각한 지역 중 하나다. 이 곳은 10.5m짜리 쓰나미가 시속 100㎞의 속도로 부딫혀왔다. 3분만에 건물을 삼킨 쓰나미는 6시간에 걸쳐 수차례 계속됐다. 수압에 집들이 과자 부서지듯 무너져 내렸고, 3.7m까지 수몰됐던 노비루 구역사는 현재 지진피해부흥전승관이 됐다.

 

10일 미야기현 히가시마츠시마시 노비루 우시로자와 노비루 구역사(현 지진피해부흥전승관)에 전시된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부서진 ATM기기.

괴멸적 피해를 입은 노비루 마을에는 피해자 명패가 모셔져 있다. 유가족이 이름을 남기길 원치 않아 뒤집힌 명패도 발견할 수 있었다. 지진피해부흥전승관 관계자는 “유가족의 심경을 미처 헤아릴 수는 없다”고 밝혔다. 이날 전승관에는 수십명의 아이들이 참관해 역사가 주는 교훈을 얻어가기도 했다.

 

10일 미야기현 히가시마츠시마시 노비루 우시로자와 노비루 구역사(현 지진피해부흥전승관)를 찾은 아이들이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휘어진 철로를 보며 설명을 듣고 있다.

미야기올레가 ‘치유와 상생의 길’로 불리는 것은 이때문이다. 2018년 10월에 개장한 게센누마·가라쿠와 코스와 일본 삼대 절경 마쓰시마를 바라보는 오쿠마쓰시마 코스로 시작된 미야기 올레는 오사키·나루코온천 코스(2019년 9월), 토메 코스(2020년 3월)를 거쳐 지난 11일 웅대한 자오연봉을 낀 무라타 코스까지 5개 코스를 이어가고 있다.

 

◆세계로 뻗는 한국의 올레

 

길은 또다른 길을 부른다. 세계적인 브랜드가 된 한국의 올레는 국제 트레일 문화의 선두주자다. 지난 12일 미야기현에서 열린 일본 미야기올레와 대만 단란고도 우정의 길 체결식에 초청받은 제주올레는 마치 국제결혼의 중신을 선 모습이었다. 제주올레 기획실 최윤정은 “대만과 일본 역사 국제관계 복잡성을 생각할 때 뜻깊은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날 체결식에서 각국 관계자들은 잇달아 제주올레 안은주 대표와 이유미 일본지사장을 찾아 감사인사를 전했다.

 

12일 미야기현에서 열린 일본 미야기올레와 대만 단란고도 우정의 길 체결식. 왼쪽부터 대만 천리보도 협회 집행장 주성심, 대만 교통부 관광청 처장 마혜달, 미야기현 부지사 이케다 다카유키, 미야기 의회 의장 기쿠치 케이이치.

대만 천리보도 협회 집행장 주성심은 이날 “한국에서 시작된 제주올레가 전세계의 길로 이어진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대만 교통부 관광청 처장 마혜달은 “트레일은 옛부터 선인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며 “자연뿐만 사람과 마음, 환경, 역사에 대한 이해를 깊게하는 세계적 콘텐츠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국경 없는 트레일이 새로운 관광 모델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미야기현 부지사 이케다 다카유키는 “이어지는 길이 미래의 길이 되도록 절차탁마하고 일치단결하길 바란다”며 “이번 우정의길 체결식이 국제교류촉진과 상호 발전, 지역 발전 기회가 되는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축하했다. 미야기 의회 의장 기쿠치 케이이치는 “2014년 제주올레와 아시아트레일컨퍼런스 모임에서 대만측과 첫 만남을 가졌다”며 “한국과 일본, 각 지역 아시아트레일 연결에 기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야기=글·사진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