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전국적 민원 서류 발급 서비스 마비를 불러온 ‘행정전산망 먹통’ 사태의 정확한 원인과 관련해 발생 닷새째인 21일도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세계 최고의 디지털 플랫폼 정부 구현’이란 윤석열정부의 국정과제를 재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여당은 또다시 지난 정부로 비난의 화살을 돌려 비판을 자초했다.
행안부는 이날 행정전산망 장애 발생의 상세 원인 분석과 재발방지 대책 수립을 위한 민·관 합동 ‘지방행정전산서비스 개편 TF’를 구성해 첫 회의를 했다고 밝혔다. TF엔 고기동 행안부 차관과 송상효 숭실대 교수를 공동팀장으로, 산학계 민간전문가와 행안부, 국방부, 국가정보원, 한국인터넷진흥원 등 관계기관이 참여하며 원인분석반과 대책수립반으로 구성된다. 첫 회의에선 원인분석반 운영방안을 논의했다. 이제서야 정확한 원인 규명에 나선 것이다.
앞서 지난 17일 전국 지방자치단체 공무원들이 쓰는 행정전산망 ‘새올’의 인증시스템 중 하나인 네트워크 장비 ‘L4 스위치‘에 오류가 발생하면서 새올과 정부 온라인 민원서류 발급 서비스 ‘정부24’가 연이어 먹통이 돼 공공기관 민원서류 발급이 전면 중단됐다. 이후 정부24와 새올은 모두 복구돼 사태 발생 후 첫 평일이었던 지난 20일 정상 가동됐다. 그러나 정보기술(IT)업계 등에선 행정안전부의 설명이 충분치 않다며 의아해한다. L4 스위치에 왜 오류가 발생했는지 구체적인 원인에 대한 설명이 빠졌다는 지적이다.
이뿐 아니라 행정전산망처럼 중요한 국가시설에서 문제가 발생했음에도 네트워크 오류에 대비한 백업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점, 평일이었던 사태 발생 전날(지난 16일) 새올·정부24의 시스템을 관리하는 행안부 산하 국가정보자원관리원이 행정전산망 관련 서버의 보안 프로그램을 업데이트했다는 점 등도 도마에 올랐다. 행정전산망을 유지·관리하는 업체가 상대적으로 리스크 대응에 약한 IT중소업체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대기업 입찰 제한’을 풀어야 하는 것 아니냔 지적도 나왔다.
행정전산망 마비로 수기(手記)를 재사용하는 일까지 벌어지면서 ‘정부 업무의 전면 디지털화’가 바람직한지를 두고 의문이 잇따른다. 이번 사태로 현장에서 수기로 발급된 전입신고서, 인감증명서 등은 6200건이 넘는다고 한다. 종이서류를 전자문서로 전부 대체하는 등 디지털 플랫폼 정부가 본격화한 뒤 비슷한 일이 터진다면 혼란이 더 클 것이란 우려도 끊이지 않는다.
여당은 이번 사태가 이전 정부부터 누적돼온 문제라고 주장했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는 이날 원내대책회의에서 “거듭되는 국가 전산망 마비는 특정 정부의 잘못보다는 2004년 전자정부 도입 이래 역대 정부에서 누적된 문제의 결과”라며 “(더불어)민주당이 이 문제에 대해 무책임한 정치 공세로 일관하는 것은 결국 ‘누워서 침 뱉기’”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윤 원내대표는 2020년 초·중·고교 온라인 수업 시스템 마비와 2021년 코로나 백신 예약 시스템 접속 장애 등을 사례로 거론했다.
윤 원내대표는 이어 “이번 사태와 관련해 전문가들이 공통으로 지적하는 첫 번째 문제는 대기업의 공공 소프트웨어 사업 참여 제한”이라고 전했다. 그는 “2013년 소프트웨어진흥법 개정으로 정부는 중견·중소 소프트웨어 업체를 육성하기 위해 자산 규모 5조원 이상 대기업에 대해서는 공공 서비스 참여를 제한해왔는데, 법의 취지와 달리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기술 격차가 줄지 않고 중소업체가 구축한 공공 전산망은 이따금 마비 사태를 일으켰다”며 법 개정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이날 정부서울청사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행정전산망) 시스템 구축 및 운영과 관련해 관행이나 구조적 문제가 없는지, 법령 미비점은 없는지를 원점에서 점검하고 정비하는 계기가 돼야 할 것”이라면서 관계 부처들에 “이번 전산 장애로 인해 민원인들에게 행정적인 불이익이 발생하지 않도록 부처별로 사례를 분석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