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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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비 아끼려고요"…고물가 지속에 ‘도시락’ 챙기는 직장인 [미드나잇 이슈]

#1. “돈 아끼려고요….”

5년차 직장인 임모(27)씨가 풀 죽은 어조로 말했다. “힘들 텐데 왜 도시락을 싸가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임씨는 치솟는 물가에 식비를 아끼고자 1년째 아침마다 도시락을 챙긴다. 그는 “같은 직장 동료들도 도시락을 싸온다”며 “점심값을 1만~1만5000원으로 잡으면 못 해도 한 달에 20만원은 절약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집밥이기 때문에 입에 더 잘 맞고, 식사를 빨리할 수 있어 시간도 절약된다”고 설명했다. 

 

#2. 유모(27)씨도 점심시간이면 직장 동료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는다. 유씨는 “회사에 구내식당이 없고, 지급되는 식비가 적어 점심을 도시락으로 먹기 시작했다”며 “도시락을 챙기는 동료가 많아 같이 점심을 먹는다”고 전했다. 도시락의 장점으론 식비 절약과 더불어 메뉴를 정할 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꼽았다. 그러면서 그는 “여름철엔 음식이 상할까 봐 걱정되고, 출퇴근할 때 가방이 무거워져서 힘든 점도 있다”고 말했다.

 

월급보다 물가가 더 빠르게 오르면서 직장인 점심값 부담이 커지고 있다. 이에 도시락을 싸와 돈을 절약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고물가 시대를 살아가는 2023년 직장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23일 설문조사 업체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직장인 점심식사 관련 인식 조사’에 따르면 63.6%가 “이전보다 점심값에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실제로 올해 직장인 평균 점심값은 8000∼9000원 수준으로 3년 전(7000원)과 비교해 1000∼2000원가량 올랐다.

유모(27)씨는 식비를 절약하기 위해 집에서 간단한 반찬과 밥으로 도시락을 챙겨 점심을 해결하고 있다. 유모씨 제공

‘평균 점심값이 얼마인가’라는 질문에 ‘9000원대’라는 답변이 20.5%로 가장 많았고 8000원대(17.2%), 1만원대(12.6%)가 뒤를 이었다. ‘점심값 부담으로 간편식으로 점심을 먹는다’(43.5%)거나 ‘아예 식사를 거른다’(32.6%)고 답한 경우도 상당수였다. 후식을 자제한다는 답변이 30.7%인 것도 눈에 띄었다.

 

지역별로는 물가지수가 높은 서울 지역 직장인 부담이 특히 높았다. 서울 41.5%, 경기·인천 35.0%, 지방 광역시 24.7%, 기타 지방 30.2% 등이다. 서울 지역 내에서도 중구·용산구 직장인이 식대 비용에 대한 부담감이 54.8%로 가장 높았다. 이어 강남·서초·송파 45.3%, 여의도·영등포 41.2%, 마포·종로 34.0% 순으로 조사됐다.

 

한국소비자원 가격정보종합포털 ‘참가격’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 기준 비빔밥 한 그릇 가격은 1만577원이다. 냉면은 1만1398원, 삼계탕은 1만6846원으로 조사됐다. 1만원 아래로 사먹을 수 있는 음식은 칼국수(8962원), 김치찌개 백반(7846원), 자장면(7069원), 김밥(3254원) 등이었다.

 

도시락에 대한 직장인 관심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도 나타났다. 이날 인스타그램에 태그된 ‘직장인 도시락’ 관련 게시물은 45만8000여건이다. 본인 도시락 사진이나 요리법을 게시하는 개인 계정도 보였다. 유튜브에서도 직장인 도시락을 주제로 요리법과 메뉴를 추천하는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각자의 도시락 메뉴를 공유하는 여러 개의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서는 100여명이 넘는 이가 참여하고 있었다.

23일 인스타그램에는 ‘직장인 도시락’ 관련 게시물이 4만8000여건 있었고, 유튜브에서는 ‘도시락 요리법’ 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인스타그램·유튜브 갈무리

전문가 역시 이런 현상에 대한 원인을 물가 상승에서 찾았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물가 상승이 1년 이상 지속된 상황이고, 직장인이 쓸 수 있는 가처분소득이 줄어든 상태다”며 “가처분소득이 감소해 소비 수준을 줄여야 하는데 필수적인 모든 부분에서 줄일 수 없으니 식비를 선택한 것으로 분석된다”고 전했다.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교수는 “고물가 상황에 익숙해지면 소비가 되살아나기도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소득이 줄어드는 만큼 (소비자는) 소비를 줄여 보전해야 한다”며 “이 상황에 익숙해지기 전까지 식비 절감을 위해 도시락을 챙기거나 구내식당을 찾는 등의 행동이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지호 기자 kimjaw@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