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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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거나 악하거나… ‘팬덤의 명암’ 조명

K팝 열풍에서 극우주의 확산까지
21세기 변화의 중심엔 ‘팬덤’ 자리
고립된 개인에 소속감 ‘선한 영향력’
트럼프 지지층, 美 의사당 습격 등
집단 경계 강화 땐 편견·갈등 초래

팬덤의 시대/마이클 본드/강동혁 옮김/어크로스/1만8000원

 

극우 성향의 하비에르 밀레이의 최종 당선으로 끝난 아르헨티나 대선 직전 해외 언론들은 방탄소년단(BTS)과 미국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변수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즉,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하비에르 밀레이 후보(자유전진당)가 당선되려면 분노한 테일러 스위프트와 BTS 팬덤을 설득해야 한다고 지난 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내용인즉슨, 가수 테일러 스위프트가 2020년 다큐멘터리에서 당시 재선에 도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반대한다고 밝힌 바 있는데, 밀레이가 ‘아르헨티나의 트럼프’로 불리기 때문에 테일러의 팬들이 그를 반대할 것이라는 의미였다. 밀레이 후보의 러닝메이트인 빅토리아 비야루엘 부통령 후보가 2020년 트위터(현재 X·엑스)에서 “BTS는 성병 이름 같다”는 혐오성 발언을 한 사실도 도마에 올랐다. 다른 나라 스타의 팬들이 아르헨티나 대선을 흔들 정도로 팬덤의 힘은 강력하다는 것을 시사하는 사례였다.

2021년 11월 28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소파이 스타디움에서 열린 방탄소년단(BTS) 콘서트 모습. BTS는 소파이 스타디움 역사상 처음으로 4회 공연을 모두 매진시켰다. 연합뉴스

실제로 테일러 스위프트가 2018년 10월 인스타그램에 미국 중간선거에 투표하라고 독려하자 전국에서 유권자 등록 건수가 급증하기도 했다. 특히 테일러 팬층인 18∼29세가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 같은 취향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똘똘 뭉치면 이처럼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고, 때로는 사회를 추동하는 힘이 된다. K팝 열풍에서 극우주의 확산까지 21세기 눈에 띄는 변화의 중심에는 팬덤이 있었다.

신간 ‘팬덤의 시대’는 대중문화와 스포츠, 정치, 범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팬덤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팬덤의 심리와 명암을 조명한다.

마이클 본드/강동혁 옮김/어크로스/1만8000원

팬덤(fandom)은 ‘광신자(fanatic)’라는 뜻에서 파생한 단어로, 1884년 야구 행사기획자인 테드 설리번이 좋아하는 스포츠에 열성적인 사람들을 가리켜 만들었다. 팬덤에 속도와 규모라는 날개를 달아 준 것은 인터넷이다. 온라인에 접속하면서부터 실시간 소통할 수 있게 된 팬들은 더욱 강한 유대감과 조직력을 갖게 됐다. 팬덤이 정치로 옮겨가 파괴적인 영향력을 떨친 것도 소셜미디어 때문이다.

사람들은 단순히 오락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한 현실을 경험하거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팬덤에 합류한다. 종교를 믿고 정당을 지지하며 군대에 자원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처럼 공통된 가치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집단을 형성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첫째는 다른 집단과 구별돼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자기 집단만의 고유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스포츠팬들이 유니폼을 입는 것도 이런 이유다. 두 번째로는 지위를 추구한다. 자신이 속한 집단이 최대한 성공하거나 명성을 얻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구별과 지위에 대한 욕구는 외부인에게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한 집단이 자신의 자격을 강화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집단을 쓰러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폴란드의 사회심리학자 앙리 타지펠은 최소집단 실험에서 집단의 경계가 정의되는 순간 편견이 시작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편견은 차별과 증오, 갈등을 가져온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이 유대인에게 자행한 홀로코스트(대학살)도 구별과 지위를 추구한 집단의 속성에서 비롯됐다.

팬덤이 정치와 만날 때 종종 위험이 따른다. 2021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대선 승리 공식화를 막기 위해 미국 국회의사당을 습격, 미국 민주주의에 큰 위협을 초래하기도 했다.

2021년 1월 6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미 의회의 대선결과 승인을 막기 위해 국회의사당 서쪽 벽을 기어오르고 있다. AP통신·연합뉴스

대량학살범이나 연쇄살인범을 숭배하는 ‘다크 팬덤’도 마찬가지다. 2007년 미국 버지니아공대 캠퍼스에서 학생 32명을 살해한 조승희는 “‘콜럼바인’을 재현하고 싶다”면서 자신을 “에릭과 딜런 같은” 순교자라고 묘사했다. 콜럼바인은 1999년 4월 콜로라도주 콜럼바인고등학교에서 12학년 학생 에릭 해리스와 딜런 클레볼드가 같은 학교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총으로 살해한 사건이다. 두 총기 살해범을 추종하는 팬들을 ‘콜롬바이너(Columbiner)’라고 부르는데, 그 숫자가 수천 명에 달한다. 미국 잡지 ‘마더 존스’ 조사에 따르면 콜럼바인은 1999∼2014년 최소 21건의 총격 사건과 53건의 테러계획에 영향을 줬다.

하지만 모든 콜럼바이너가 잠재적 범죄자나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페이스북, 레딧, 텀블러에 올린 글에서 이들은 또래에게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한 경험을 털어놓으며 이로 인해 삶이 얼마나 힘들어졌는지 설명한다. 총기 난사범들을 자신과 같은 피해자로 여기며 공감하는 것이다.

팬덤에는 대체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져 있지만, 고립된 개인에게 소속감을 부여하고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유대인 중 이전 수용소에서 같이 지내던 동료 수감자들과 함께 온 사람들의 사망률이 적어도 20% 낮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또 정치조직에 소속된 고문 피해자는 정치적 소속이 없는 피해자보다 심리적 문제를 적게 경험하며, 군인이 민간인보다 포로 생활을 잘 견딘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집단의 치유 효과를 ‘사회적 치료(Social cure)’라고 부른다. 총 30만 명 이상이 참여한 건강연구 148건을 검토한 결과 흡연, 운동, 식단 등의 요인보다 사회적 연결이 개인의 건강에 더 중요하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팬덤은 진보와 퇴보를 동시에 부르는 양날의 칼과 같다. 하지만 저자는 10대 시절 열렬히 좋아하는 록밴드가 있었는데도 팬클럽에 가입하지 않는 것이 후회된다며 다음 기회가 온다면 “올인”하겠다고 말한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