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오랜 친구를 결코 잊지 않으며 중·미 관계는 항상 헨리 키신저의 이름과 연결될 것이다.”
미국과 중국이 첨단 기술에 대한 수출 통제 조치 등을 주고받으며 긴장이 최고조로 치닫던 7월20일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중국 베이징을 깜짝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마주 앉았다. 한해 내내 두문불출하던 시 주석은 키신저 전 장관을 친히 맞아 ‘오랜 친구’라고 부르며 환대했다. 100세 생일을 넘긴 키신저 전 장관은 지팡이를 짚고, 부축을 받았지만 그의 영향력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세계에 다시 한 번 확인시킨 순간이다.
‘살아있는 외교의 전설’이라는 수식어로 전 세계 외교계를 평정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29일(현지시간) 별세했다. 1923년 5월27일 생인 고인은 향년 100세를 일기로 긴 여정을 마쳤다.
독일에서 태어난 키신저 전 장관은 1938년 가족과 함께 나치의 유태인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했다. 1943년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뒤 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전역 후 하버드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키신저 전 장관은 1950년 최우등으로 학부를 졸업했다. 학부 졸업 논문 ‘역사의 의미: 스펜글러, 토인비, 칸트에 대한 성찰’은 약 400페이지에 달해 하버드대가 학부생의 논문 분량을 제한한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버드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뒤 정치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1969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됐고, 국무장관을 거쳐 후임 제럴드 포드 정부에서도 국무장관을 지냈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70년대 미국과 소련과의 데탕트(긴장완화) 정책을 시도, 1972년 5월 미·소 양국 간 핵무기 배치를 동결하는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도출했다.
1971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제3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계기로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가 시작되자 키신저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은 7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을 방문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저우언라이(周恩來) 수상과 만나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마오쩌둥(毛澤東) 국가주석과의 미·중 정상회담, 양국 수교 문제 등을 논의하고, 실현시켰다. 키신저 전 장관이 1971년 극비리에 중국을 첫 방문한 것은 ‘죽(竹)의 장막’을 걷어내고 미·중 수교의 발판을 만들었다고 평가된다.
1973년 이집트와 시리아가 주축이 된 아랍 연합군과 이스라엘 간의 제4차 중동전쟁 때는 키신저 전 장관이 개입, 이스라엘과 이집트 관계 개선을 위해 두 국가를 오가는 ‘셔틀 외교’를 통해 휴전을 이끌어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베트남전 종전에도 관여했다. 1973년 1월 북베트남 대표 레득토(黎德壽)와 프랑스 파리에서 만나 남·북 베트남, 미국 사이에 종전을 선언하는 파리평화협정을 성사시켰다. 키신저 전 장관은 그 공로로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다만 1975년 레득토가 남베트남을 침공하며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노벨상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노벨평화상 시상식에 불참했고, 이후 상을 반납했다.
강대국 중심의 현실정치 대가로 키신저 전 장관을 둘러싼 논란도 적지 않다. 1971년 이후 100번 이상 중국을 방문할 만큼 친중 인사인 키신저 전 장관은 1989년 6월 톈안문(天安門) 학살에 대해 ‘딜레마’라고 표현하는 등 지나치게 중국을 감싸고 돌았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지지하고, 동티모르 독립을 막으려는 인도네시아의 잔인한 진압에 눈을 감았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당시인 2017년 8월에는 월스트리트저널(WSJ) 기고에서 “워싱턴과 베이징의 상호이해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본질적인 선결 조건”이라며 “아시아 지역의 비핵 유지는 중국에 더 큰 이해가 걸린 사안이고 구체적인 행동을 담은 미·중 성명이 평양을 고립시킬 수 있다”도 밝히기도 했다. 당시 키신저 전 장관은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북한 정권붕괴 이후 주한 미군 철수를 중국에 약속하면 중국도 북핵 해결에 나설 것이라고 조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키신저 전 장관은 박정희 정부가 1971년 미 7사단 병력 철수 이후 1975년 독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자 이를 강력히 막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도쿄 납치사건 당시 김 전 대통령의 구명에 나서기도 했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키신저 전 장관이 20세기 가장 위대한 외교 전략가라는 평가에는 이견이 많지 않다.
키신저 전 장관의 100세 생일을 앞두고 그의 아들 데이비드 키신저가 워싱턴포스트에 아버지의 장수 비결과 관련해 기고를 실었다. 데이비드 키신저는 아버지가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사태 이후 2권의 책을 집필하고, 새로운 집필에 들어갔다고 소개했다. 키신저 전 장관은 2021년 인공지능(AI)과 관련한 저서를 2022년에는 리더십과 외교에 대한 저서를 펴냈다. 데이비드 키신저는 ”그는 꺼지지 않는 호기심으로 세상과 역동적으로 소통하고 있다. 그의 정신은 당대의 실존적 과제를 파악하고 이에 맞서 싸우는 뜨거운 무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