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최시한의말글못자리] 한글맞춤법과 신명균

한글이 우수한 문자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 우수성 가운데 하나가 입으로 내는 소리를 두루 잘 적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를 들어 해가 떠 있는 때를 ‘낟’처럼 발음하면서 ‘낮’이라고 적는다. 언문일치(言文一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소리를 잘 적는다는 글자를 왜 이렇게 사용하는 것일까?

발음과 그것의 표기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아무리 좋은 글자라도 끊임없이 변하는 소리를 다 적을 수 없고, 그래봐야 보람도 적다. 표기 형태가 고정돼 있지 않으면, 앞의 ‘낮’이 환경에 따라 ‘나제’, ‘밤낟’처럼 적게 되므로, 읽을 때 같은 말임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글맞춤법이라는 표기 규칙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그 제1항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이다.

 

한글은 4세기 반 동안이나 한문보다 격이 낮다는 뜻의 ‘언문’으로 취급되다가, 갑오개혁(1894)에 이르러서야 공식 문자 대접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 백성이 문맹에서 벗어나고 근대적 교육을 받으려면 한글이 필수 도구였다. 하지만 표기 방법이 완비되어 있지 않았다. 그 과업을 주로 수행하며 ‘한글운동’을 이끈 사람이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요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였다. 이 문화독립투쟁의 맨 앞줄에 있던 사람이 신명균이다.

신명균은 스승을 ‘가장 가까이 모신’ 제자로 자부했고,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앞장섰다. 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으로 그 사업을 주도했으며, 한글 표기법을 풀이한 글을 짓고 전국을 돌며 강연했다. 한글 서적도 출판하고 방정환의 ‘어린이’와 나란히 잡지 ‘신소년’을 발간하여 청소년을 가르쳤다. 그가 근대적 표기와 문체의 예를 제시한 교재를 보고, 소설가 이광수는 ‘옳지, 이렇게 써야만 해!’라고 감탄했다고 썼다. 그러나 신명균은 한국어와 민족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여 해방을 보지 못한 채 자결하였다. 그리고 오래 잊혔다. 망우리 공동묘지에서 그의 묘, 깨진 묘비밖에 남지 않은 묘지터를 천행으로 발견했을 때, 필자의 심정은 암울했다.

한글은 우수한 글자이나 그 자모로 지금처럼 한국어를 적는 데는 많은 이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 신명균 같은 영웅적 백성의 피와 땀이 있었다.


최시한 작가·숙명여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