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자르고 확대하고 덜어내고 나니… 그제야 보이는 ‘너’의 마음

‘프레임의 작가’ 카틴카 램프 개인전

정체성 부각 기존초상화 틀 깨고
작품 속 인물 관련 아무 정보 없어
과감한 크롭·줌인 등 통한 프레이밍
기존 관점 탈피 새로운 시각 부여
“타인 이해하는 기획·폭 늘리는 일”
내년 1월10일까지 리안갤러리 서울

매끄럽고 연약한 비누를 쥘 때처럼 화면 가득 흐르는 질감이 마냥 좋다. 부드럽고 평온하며 아늑하다. 느리게 시간을 투자해 얻어낸 유화의 멋이자 덕이다. 팔레트가 아닌 캔버스에 곧장 물감을 짜내어 솔이나 헝겊으로 문지르면서 물감을 섞었다. 카틴카 램프의 작품 ‘6580211’과 ‘6580213’이다.

 

그에게는 프레임(Frame)이란 단어가 수식어처럼 따라다닌다. ‘프레임의 작가’ 카틴카 램프. 프레임은 하나의 강력한 제안 혹은 제약이다. 우리가 바라보는 방식을 조건지어 버린다. 특정한 대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볼 것을 강제하는 것이다.

‘6580211’(왼쪽), ‘6580213’. 리안갤러리 서울 제공

과감한 크롭(잘라내기), 생경한 앵글, 줌인, 실제보다 큰 재현 등은 프레이밍을 수행하는 작가 카틴카 램프 특유의 방식이다. 그의 작품과 처음 마주 서면 익숙지 않은 어색함이 잠시 엄습하지만, 이내 아무런 거부감이나 저항감 없이 보이는 그대로 수긍하며 받아들이게 된다. 이 또한 그의 작품이 지닌 특징이자 매력이다.  

 

카틴카 램프는 렘브란트, 프란스 할스, 요하네스 베르메이르 등 네덜란드 전통 인물화가의 맥을 잇는 작가다. 가족을 비롯해 다양한 인종의 모델을 작품에 등장시킨다. 그러나 작품 속 인물에 대한 어떤 정보도 제공하지 않으며, 심지어 제목마저도 일련의 숫자로 붙여 놓는다. 인물의 실제 특성을 없애고 작가의 시선을 통해 이미지를 재창조하는 것이다.

 

한눈에 봐도 초상화인데, 인물의 정체성이나 감정상태가 드러나 보이는 기존 초상화와는 확연히 다르다. 그의 그림 속 인물들은 대부분 고개를 숙이거나 옆얼굴 일부, 뒷모습, 심지어 얼굴이 없는 몸통을 보여줄 뿐이다. 윤곽 또한 흐릿하게 처리돼 다소 몽환적이거나 신비로운 분위기가 강하다. 이는 오히려 더욱 유심히 관찰하도록 이끄는 구실을 한다. 초상화의 재해석이자 확장이다.

‘2090223’. 리안갤러리 서울 제공
‘4555233’. 리안갤러리 서울 제공

관람객이 작품을 들여다보는 동안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반영하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도록 유도한다. 작가에 따르면 자신은 거울처럼 반사하는 이미지(Reflective Images)를 만드는 데 집중할 뿐이다.

 

‘My Frame Your Frame’(마이 프레임 유어 프레임)이란 주제를 내건 그의 개인전이 내년 1월10일까지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12길 9 리안갤러리 서울에서 열리고 있다. 

 

그의 회화는 ‘사진 기반(photography-based)’ 작업에서 나온다. ‘사진 기반’이란 단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진을 참조하거나 활용하기보다는, 차라리 유화작업의 기반 자체가 사진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램프는 붓을 들기에 앞서 모델, 소품, 조명을 동원해 장면을 구성하고 사진을 찍는다. 이 과정에서 크롭이 이뤄지고, 앵글이 결정되며, 프레이밍도 완성된다. 램프의 유화는 사진에 ‘기반’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이미 사진인 셈이다. 

‘2415221’. 리안갤러리 서울 제공
‘8010225’. 리안갤러리 서울 제공

그는 늘 새로운 관점을 끌어내고자 자신에게 강요한다.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던 기존 관점을 새로운 프레임에서 살펴보자고 제안한다.

 

“관점을 ‘리프레밍’(재구성, 관점바꾸기)한다는 것은 굉장히 강력한 행위입니다. 사고방식을 달리해서 바라본다는 것은 타인을 이해할 기회와 폭을 늘리는 일이에요. … 장르의 경계에서 작업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늘 자문합니다. ‘초상화란 무엇인가?’ 장르의 한계선을 넘어 보려는 시도겠지요. … 그동안 제가 여성 아티스트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살았는데, 최근 자각하게 됐습니다. 남성이 지배하는 예술세계에서 성장했고, 적응하기 위해 스스로 중성화했었죠. 물론 제 그림에 많은 여성이 등장합니다만. … 그러다 요즘 여성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후배 세대를 보면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핑크색을 비롯해 소녀적인 감성, 스윗한 것이 엿보이는 이유입니다. 어쩌면 제 작업에서 ‘개념’ 부분을 줄이고, ‘감정’에 집중할 때가 온 것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신성 선임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