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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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기술이 패권경쟁 승패 가른다 [심층기획-‘기정학(技政學) 시대’ 강소국 네덜란드를 가다]

<상> 반도체 그다음은 ‘양자전쟁’

슈퍼컴퓨터 성능보다 월등
AI·신약 등 개발 ‘핵심 축’

큐텍 성공 비결은 ‘산학연 협력’

델프트 공대·TNO 연구자들 설립 제안
네덜란드 정부 2000억 투자 전폭 지원
“엔지니어가 공정, 과학자는 연구 집중”
MS 등과 협업… 스타트업 창업도 활발

양자컴, 단 200초 만에 ‘난수’ 해결

세계 금융·군사 보안 무력화 가능 의미
美·中 등 강대국 국가전략기술로 선정
韓은 2023년 양자 원년 선포 ‘지원법’ 통과
5년 정도 뒤처져… 기술격차 해소 시급

“이곳은 우주에서 가장 추운 곳입니다.”

지난달 7일(현지시간) 방문한 네덜란드 양자 기술 연구소 ‘큐텍’(Qutech)에서 양자 컴퓨팅을 연구하는 파블로 코바 파리나씨는 실험실에 들어선 취재진에 양자 컴퓨터가 들어 있는 흰 냉각기를 가리키며 이렇게 소개했다.

양자컴퓨터 맨 아래쪽 원판 가운데 뚫린 원 안에는 컴퓨터의 ‘두뇌’ 역할을 하는 프로세서 칩이 들어있다.

냉각기 안의 온도는 10밀리켈빈(mK)이다. 생소한 단위에 고개를 갸우뚱하자 파리나 연구원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영하 273도 정도”라고 덧붙였다. 우주 공간의 온도인 4켈빈(영하 269.15도)보다도 더 추운 것이다. 현재 초전도체 기반 양자컴퓨터는 이론적으로 가장 낮은 온도인 절대영도(0K·영하 273.15도)에 가까운 극저온, 진공 상태에서만 제대로 작동한다. 양자컴퓨터의 정보 단위인 초전도 큐비트가 온도(열)와 빛, 진동 등 외부 요소에 취약한 탓이다. 이러한 환경을 유지하지 않으면 큐비트의 오류가 더욱 많아진다.

 

한국에는 이 정도 온도까지 내려가는 냉각기가 없다. 극저온 냉각 기술은 양자컴퓨터를 가동하는 데 필수적이지만 네덜란드와 영국, 미국 등 양자 기술 선두 국가들만 보유하고 있다. 양자컴퓨터 분야에서는 한국이 명백한 후발주자임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세계는 ‘양자전쟁’ 중

 

현대는 지정학(地政學)이 아닌 기정학(技政學)의 시대라는 말이 나온다. 지리적 요인보다도 첨단 과학기술을 가진 나라가 국제사회의 패권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양자, 특히 그중에서도 양자컴퓨팅 기술이 패권경쟁의 중심에 있다. 기존 컴퓨터의 정보 단위인 비트는 0 또는 1 하나의 값만 가질 수 있지만, 양자컴퓨터는 0이면서 동시에 1인 중첩 상태의 큐비트를 사용해 2의 제곱수를 하나의 단위로 삼아 정보를 저장하고 처리한다. 모든 계산을 순차적으로 하는 기존 컴퓨터와 달리 2큐비트 양자컴퓨터는 4개, 10큐비트는 2의 10제곱인 1024개에 이르는 경우의 수를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다. 양자컴퓨터 개발에서 가장 앞서가는 미국 IBM은 이미 지난해 말 433큐비트 프로세서를 내놨다.

 

슈퍼컴퓨터가 푸는 데 60시간이 걸린 난수(규칙 없이 무작위로 만들어진 수) 문제를 양자컴퓨터는 단 200초 만에 해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양자컴퓨터는 기존 컴퓨터보다 소인수분해에서 특히 빠른 속도를 자랑하기 때문이다. 암호시스템의 핵심인 난수의 빠른 해결은 발전한 양자컴퓨터가 모든 금융·국방 분야 등의 보안을 무력화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결국 가장 좋은 성능의 양자컴퓨터를 가진 나라가 다른 나라의 중앙은행과 정부기관 등을 해킹하는 시나리오가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다.

 

양자컴퓨터는 또 수많은 시뮬레이션이 필요한 신약·신소재 개발 등에서도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인공지능(AI)과 양자컴퓨터가 결합하면 인간 지능을 훌쩍 뛰어넘는 초인공지능(ASI)이 등장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미국, 중국, 유럽, 일본 등 주요 강대국이 모두 양자를 국가전략기술로 선정하고 연구·개발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8월 행정명령을 통해 중국 양자컴퓨팅 기술에 대한 미국인·기업의 투자까지 금지했다. ‘이제는 반도체가 아니라 양자전쟁의 시대’라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한국은 경쟁에서 뒤처져 있다. 우리나라의 양자컴퓨터 기술은 선두국의 70% 수준으로, 5년 정도 격차가 있다고 평가받는다. 정부는 올해를 비로소 양자 기술 도약을 위한 원년으로 선포했다. 양자 기술과 산업 육성을 지원하는 ‘양자법’이 지난 10월 국회를 통과했다. 미국 정부는 2018년 양자법을 제정했고, 올해까지 1조원 넘게 투자했다.

 

큐텍을 보유한 네덜란드도 유럽을 대표하는 양자 기술 강국이다. 큐텍은 세계 최정상 수준의 양자 컴퓨팅, 양자 인터넷, 큐비트 연구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 인텔 등이 큐텍에 파트너십을 요청해 함께 관련 기술을 개발할 정도다. 큐텍은 양자 컴퓨터 클라우드 서비스를 유럽 최초로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한국과 네덜란드는 ‘작지만 강한 나라’라는 공통점을 가졌다. 작은 국토와 적은 인구, 부족한 천연자원, 주변 강대국의 침략과 지배로 인한 상처를 국민의 근면 성실함과 기술력으로 극복해냈다. 공통점이 많을수록 본보기로 삼기에도 좋다.

큐텍이 위치한 델프트 공대 22번 건물 외관.

◆양자 연구, 산학연 협력 허브 필수

 

큐텍은 네덜란드 델프트 공과대학교와 국립 응용과학연구소(TNO)가 양자 기술 연구를 위해 2015년 공동으로 설립했다. 델프트 공대는 세계 공대 순위에서 10위권에 꼽히는 현지 최고 명문이다. TNO는 델프트 공대와 같은 네덜란드 유수 대학의 기초 연구를 응용해 원천기술을 상용화에 가깝게 만드는 국립 연구소다.

 

큐텍과 TNO 모두 델프트 공대 캠퍼스 내에 자리 잡고 있다. 캠퍼스 안 카페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고 TNO까지 걸어가는 데는 고작 1분이 걸렸다. TNO를 둘러본 뒤 큐텍을 향할 때도 건물 외부로 나갈 필요 없이 내부 통로를 거쳐 몇 분 만에 도착했다.

 

델프트 공대와 TNO의 양자 연구·기술자들은 2013년 네덜란드 정부에 큐텍을 설립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양자 연구가 워낙 다양한 학문의 접근과 기술을 요구하다 보니 관련 연구진과 엔지니어를 한 곳에 모을 허브(Hub)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양자는 인류의 미래를 바꿀 기술’이라는 과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2000억원이 넘는 전폭적인 지원을 시작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케이스 에이케 큐텍 사업개발부문 이사는 취재진과 만나 큐텍 성공 비결 중 하나로 “학제적 접근(Multidisciplinary Approach)”을 꼽았다. 큐텍 연구진은 물리학 외에 전기공학, 컴퓨터공학, 수학, 재료공학 등 다양한 전공을 가진 이들로 구성돼 있다.

 

기초연구를 진행하는 과학자들과 응용 개발을 수행하는 엔지니어들이 함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것도 큐텍의 특징이다. 에이케 이사는 “매우 다른 성격을 띠는 연구 집단과 엔지니어링 집단을 결합하기로 한 우리의 결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이를 통해 결국 전체적인 (양자)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두 집단의 결합을 통해 기술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기초연구를 집중적으로 수행하고, 다음으로 수행할 기초연구의 방향도 정해진다”고 덧붙였다.

 

큐텍은 기업과의 파트너십에도 열성적이다. MS와는 양자컴퓨터용 운영체제(OS)와 언어를, 인텔과는 컴퓨터 프로세서 패키징 기술 등을 함께 개발하고 있다. 일본 1위 정보기술(IT) 기업 후지쯔와도 협력 관계다.

 

큐텍 연구진의 스타트업 창업도 활발하다. 큐텍 내에서 개발한 양자 관련 기술을 즉각 사업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스핀오프(분사)에 성공한 기업들은 그 자체로 큐텍의 강력한 마케팅 수단이 된다. ‘양자 연구가 실제로 돈이 된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며 여러 기업의 투자를 끌어내고 있다.

큐텍 실험실 안의 양자컴퓨터. 황금빛 샹들리에를 닮았다. 큐텍 제공

◆양자 인력 확보도 핵심

 

에이케 이사는 큐텍의 두 번째 성공 비결로 ‘다양한 국가로부터의 인재 확보’를 꼽았다. 그는 “우리는 전 세계 최고의 인재들을 끌어 모았다”며 “최고의 음악가들이 모이면 훌륭한 밴드가 탄생하게 된다”고 말했다.

 

큐텍의 실험실을 소개한 파리나 연구원의 국적은 스페인이다. 반가운 한국인 연구원도 만날 수 있었다.

 

윤지원(29)씨는 큐텍에서 박사후연구원(포닥)으로 양자 인터넷을 연구 중이다. 박사 과정까지 모두 한국에서 마친 윤씨는 큐텍을 택한 이유로 “분업이 잘 돼 있어 연구자는 연구만 고민하면 되는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그는 “실험을 진행하려면 냉각기 설치·소자 공정 등 많은 준비 과정이 필요한데, 큐텍에는 이미 냉각기를 담당하는 엔지니어가 고용돼 있고 공정도 TNO 엔지니어들이 전부 맡아서 해준다”며 “나처럼 물리학을 전공한 박사들은 와서 내 공부에만 고민하고 집중할 수 있어서 매우 효율적”이라고 설명했다.

 

큐텍은 차세대 양자 인력을 육성하겠다는 목표로 별도의 온라인 교육과정도 운영하고 있다. 2015년 시작된 큐텍 아카데미에서 교육 인증서를 취득한 연구원과 학생은 현재 10만명이 넘는다. 큐텍 연구진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양자 원리를 교육하는 봉사활동에도 나선다.

 

에이케 이사는 “아직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도,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며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은 우리가 통달한 전기 역시, 150년 전에는 마법 같은 존재였죠.”


델프트=이지안 기자 ea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