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넘어 산이다. 이동관 전 방송통신위원장 자진 사퇴로 한 달 가까이 이어온 국회 ‘탄핵 정국’이 끝나자마자 ‘쌍특검 정국’이 다시 시작될 판이다. 야당이 정기국회 중 쌍특검(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의혹 특검·대장동 50억 클럽 특검) 처리를 공언하면서 8일 본회의 처리 가능성이 대두되면서다. 여야의 극한 대치가 쉬지 않고 이어지면서 내년도 예산안 협상은 뒷전으로 밀려난 형국이다. 이미 법정 처리시한(12월2일)을 넘긴 가운데 R&D(연구·개발) 예산·권력기관 특수활동비 등 쟁점 예산에 대한 이견 차가 큰 것으로 알려지면서 헌정 사상 최초로 ‘준예산 정국’에 돌입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온다.
여야는 예산안이 3년 연속 법정 처리 시한을 넘긴 데 대해 3일 ‘남탓’으로 일관하는 모습이었다. 헌법은 국회가 회계연도 개시 30일 전인 12월2일까지 예산안을 의결하도록 하고 있다.
◆예산안 3년 연속 지각…여야 ‘남탓’만
한덕수 국무총리는 3일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고위 당·정·대 협의회에서 “국회에서 국민 삶과는 먼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국민의 절박한 목소리에 부응해 신속히 민생경제 법안과 내년도 예산안 처리에 나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도 “민주당의 습관성 묻지마 탄핵과 막가파식 특검 폭주로 국회의 정상 기능이 마비되고 국정 운영 발목잡기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며 “결국 예산안은 법정 처리 시한을 넘겼고 처리 못 한 민생 법안도 계속 쌓여만 간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의 이 전 방통위원장 등 탄핵 시도와 쌍특검 추진 때문에 예산안·민생법안이 표류하고 있단 것이다.
민주당은 국민의힘이 탄핵·쌍특검을 빌미로 국회를 일부러 멈춰세우고 있다는 입장이다. 임오경 원내대변인은 같은 날 서면브리핑에서 “국민의힘은 지금 예산안과 민생법안을 처리할 의지가 있기는 하냐”며 “예산안과 민생법안 처리에 앞장서야 할 여당이 예산안과 법안 심사를 막고 있으니 기가 막힌다”고 말했다. 이재명 대표 또한 지난 1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여당이 민생 위기나 경제 위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언론 탄압, 방송 장악, 정쟁에만 몰두하고 있다”며 “세상에 정부여당이 예산 심의와 예산 통과에 이렇게 무관심한 걸 본 적이 없다”고 따졌다.
◆예산안, 정기회 넘길 듯…준예산 우려도
국회 예산 심사가 제때 마무리되지 못해 국회 선진화법에 따라 정부 원안이 현재 본회의에 부의된 상태다. 예결위는 지난달 13일부터 예산안 조정소위를 가동해 657조원 규모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심사했지만 R&D 예산과 권력기관 특수활동비, 원전·재생에너지 예산, 새만금 사업 등을 놓고 여야 견해차가 커 일부 감액 심사만 마쳤을 뿐 증액 심사는 시작도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예결위원장과 여야 간사만 참여하는 ‘소소위’도 가동했지만 지지부진한 상태다. 민주당은 최근 R&D 예산과 새만금 사업 예산 등 특정 예산 증액이 이뤄지지 않으면 예비비 일부 등 총 4조6000억원 감액을 골자로 하는 수정안을 단독 처리할 수 있다는 의사를 내비치기도 했다. 예산 증액은 정부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최후의 카드’까지 흔들며 정부여당을 압박한 셈이다. 예결위 야당 관계자는 이날 통화에서 “일단 정기국회 내 처리를 목표로 해서 매일 여러 형태로 의견을 교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민주당이 쌍특검을 8일 본회의에서 처리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 예산안 합의·처리가 결국 정기국회 종료일(9일)을 넘길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 경우 여야는 양당 정책위의장·예결위 간사·원내대표가 참여하는 별도 협의체를 가동해 협상을 이어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에도 국회는 법정 처리시한이 22일 지난 12월24일 본회의에서 가까스로 처리한 바 있다. 이는 선진화법 시행(2014년) 이후 가장 늦은 예산안 처리로 기록돼 불명예를 안았다.
정기국회 이후 별도 협의체 협의 또한 공전하고 쌍특검 정국이 장기화할 경우 이 기록을 올해 경신할 가능성도 있다. 최악의 경우, 새 회계연도 개시(2024년 1월1일)까지 예산안을 의결하지 못해 전년도 예산에 준해 예산을 집행하는 ‘준예산 정국’에 헌정 사상 최초로 돌입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내년도 상반기 신규 사업은 예산 지출이 불가하고, 국방비와 공무원 인건비 등 최소 비용만 써야 해 국정 운영에 차질이 불가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