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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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기 토양 기술력으로 극복… 농식품 수출 세계 2위로 ‘우뚝’ [심층기획-‘기정학(技政學) 시대’ 강소국 네덜란드를 가다]

<하> 식량위기 극복 위한 스마트팜

세계 인재들로 넘치는 바헤닝언 대학
연구소 內 AI 토마토 온도 체크 눈길
활발한 연구로 농업인 첨단기술 전수

지역에선 농식품 산단 ‘푸드밸리’ 조성
네슬레·하인츠 등 기업·기관 공동 연구
대학과도 협업 환경 구축… 시너지 배가

산업혁명 후에도 일차산업 육성 온힘
농가 경지면적 늘려 대규모 농업 승부
“일찍부터 자동화… 스마트팜성장 토대”

“카메라에 말 걸지 마세요. 당신을 찍을지도 몰라요.”

 

지난달 9일(현지시간) 찾은 네덜란드 바헤닝언 대학 연구소(WUR)의 시설원예(스마트팜) 연구시설 ‘엔펙’.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불이 켜진 유리 온실 천장에 달린 카메라를 가리키며 벤 헤일링스 WUR 국제협력 담당자는 농담 반 진담 반의 경고를 던졌다.

‘AI 농부’가 키우는 토마토 네덜란드 바헤닝언대 연구소가 운영하는 스마트팜 연구소 엔펙(NPEC)의 유리 온실에서 자라고 있는 토마토 나무들. 나무 앞에 놓인 초록색 화분에 손잡이처럼 달린 검은색 줄은 작물에 물을 주는 관수선이다. 화분 밑의 하얀색 받침대는 화분에서 자라는 작물의 무게를 잴 수 있어서, 화분에 심은 작물의 물 흡수량을 측정해 데이터화한다.

온실 안에 빼곡히 심어진 토마토 나무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카메라들은 실제로 시시각각 나무 이파리와 열매를 촬영한다. 농작물의 생육 상태를 디지털 장비를 통해 실시간 수집하는 ‘피노타이핑’(Phenotyping) 기술이다.

 

사진 데이터가 쌓이면 ‘인공지능(AI) 농부’가 등장한다. 어떤 품종이 고온에서 더 잘 자라는지, 똑같은 양의 물을 줬을 때는 어떤 품종이 더 적게 물을 흡수하는지 등 작물의 유전적 특성을 AI 시스템이 사진을 보며 분석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모두 사람이 눈으로 보며 직접 했던 일이다. AI 농부는 훨씬 빠른 속도로 분석을 마친 뒤 그 데이터도 클라우드를 통해 주변 농가들에 신속히 공유한다.

 

이렇게 첨단 과학기술을 농업에 접목해 효율성과 생산성을 극대화하는 스마트팜은 기후변화 등이 초래할 식량 위기의 대안으로 꼽힌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스마트팜 육성에 열을 올리고 있다. 세계 스마트팜 시장 규모는 2026년 281억달러(약 37조원)에 이를 전망이다.

 

네덜란드는 독보적으로 앞서나가는 스마트팜 강국이다. 스마트팜 보급률이 무려 99%다. 육지 면적이 경상도 크기와 비슷한 약 3만3000㎢에 불과한데도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농식품 수출국으로 자리 잡은 비결 중 하나가 스마트팜이다. 네덜란드는 미국의 240분의 1에 불과한 땅 크기, 소금기 많은 토양, 비가 많이 내리는 해양성 기후 등의 악조건을 기술력으로 극복해 냈다.

작물의 생장데이터를 만들기 위해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이파리 사진이 엔펙 내 연구용 컴퓨터 모니터에 띄워져 있다. 엔펙에는 작물의 3차원 입체 영상을 촬영할 수 있는 장비도 마련돼 있다.

◆세계 1위 농업 대학과 기업 협업이 키운 기술력

 

이날 방문한 WUR은 네덜란드의 스마트팜 기술 연구·개발을 책임지는 곳이다. 네덜란드의 스마트팜 기술력은 각종 세계대학평가에서 농업 분야의 독보적 1위인 바헤닝언대의 활발한 연구에서 비롯됐다. WUR은 이러한 기술을 농업인들에게 전수하는 교육도 도맡는다.

 

우수한 대학엔 전 세계의 인재들이 몰린다. 헤일링스 WUR 국제협력 담당자는 “대학원생의 45%가 100개국이 넘는 다른 나라에서 온 학생”이라며 “한국 학생도 석사 과정에 7명, 박사 과정에 8명이 있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등 식량 위기가 심각한 개발도상국에서 온 학생들도 많다고 한다.

바헤닝언대 학생들은 ‘취업 걱정’도 없다. 헤일링스 WUR 국제협력 담당자는 “졸업생 취업률은 100%나 다름없다”며 “바헤닝언에서 공부한 사람은 일자리를 찾을 필요가 없다. 일자리가 그를 찾으러 올 것이기 때문”이라는 졸업생의 말을 인용했다.

 

바헤닝언의 높은 위상은 이 지역에 세계 최대 규모 농식품 산업단지 ‘푸드밸리’를 탄생시켰다. 미국 실리콘밸리가 그 지역의 명문 스탠퍼드대를 중심으로 정보기술(IT) 기업들이 몰려들고, 스탠퍼드대 졸업생들이 또 이 지역에서 IT 기업을 창업하면서 조성된 것과 같은 과정이다.

푸드밸리 역시 바헤닝언대의 기술과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이 주변으로 농식품 기업과 연구소 등이 몰려들면서 2004년 공식 출범했다. 네슬레·하인즈 등 1400개가 넘는 식품 기업의 지사와 연구소, 20개 연구기관 등이 공동연구와 같은 협업을 진행한다. 푸드밸리는 또다시 바헤닝언대의 연구 성과와 기술 수준을 높이는 선순환 효과를 낳는다. 바헤닝언대 캠퍼스 안에는 WUR, 기업 연구소, 농식품 스타트업, 개방형 실험실과 실험 농지, 연구기관이 한데 모여 있다. 최적화된 협업 환경은 더 많은 기술 혁신을 일으켰다.

 

카롤리너 베이커르크 WUR 파트너십 담당자는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건물을 사용한다는 것만으로도 혁신 생태계가 만들어진다”며 “같이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고, 우연히 마주칠 기회가 많아지면서 지식 이전의 효과도 커진다”고 설명했다.

◆농업을 포기하지 않았던 나라

 

네덜란드가 스마트팜 강국이 될 수 있었던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네덜란드가 이미 농업 강국이었다는 점이다. 강호진 주한네덜란드대사관 농무관은 “전 세계에서 농업을 한 번도 포기한 적 없었던 나라는 네덜란드가 유일하다”고 말했다. 현재 농업 강국으로 꼽히는 독일, 프랑스, 미국 등도 산업혁명 이후에는 일차 산업인 농업이 아닌 중공업과 같은 이차 산업으로 나라의 주요 산업 구조를 재편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만큼은 꿋꿋이 농업을 나라의 핵심 산업으로 삼았다.

 

강 농무관은 “18세기에도 네덜란드 농업인들의 시민의식과 지식수준이 매우 높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며 “농부들이 농업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생산성을 높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소득을 도시인들만큼 늘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고민 끝에 찾은 답이 농가당 경지면적을 늘리는, 농업의 ‘대규모화’였다. 현재 한국의 농가당 경지면적은 1만6000㎡에 불과하지만 네덜란드는 26만㎡에 이른다. 한국에 많은 소규모 영세농은 드물고 대다수가 거대한 농장을 운영하는 기업농이다.

 

더는 사람이 관리할 수 없이 농장이 커지니 농장의 자동화가 자연스레 이뤄졌다. 기계의 도움 없이는 농장을 경영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강 농무관은 “네덜란드는 스마트팜을 만들겠다고 생각해서 만든 것이 아니다”라며 “농장의 기계화, 스마트화가 불가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관련 기술과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게 됐다”고 말했다.


바헤닝언=글·사진 이지안 기자 ea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