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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시집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곽효환 “오늘도 수척한 빈산 노거수 그늘에 들어 더듬는다”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 아무르 강가 ‘죽음의 계곡’에 섰다. 최초의 조선인 볼셰비키로 알려진 김알렉산드라가 처형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쌀쌀한 바람은 100년 전 바로 그날로 이끌었다. 그러니까 1918년 9월, 백군은 처형을 앞둔 그녀의 눈에 감긴 붕대를 풀어줬다. “조선인이 무슨 이유로 러시아 내전에 참여했느냐”는 백군의 물음에, “조선 인민이 러시아 인민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해야만 나라의 자유와 독립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고 답한 그녀였다.

팬데믹이 휩쓸기 몇 해 전, 시인 곽효환은 연해주 일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 김알렉산드라가 활동했다는 지역도 둘러보았다. 이때 처음 그녀의 존재를 알게 됐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자료를 찾아보며 공부했다. 다시 두 번째 연해주 지역을 찾았을 때, 그녀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그녀가 백군에 의해 처형된 아무르 강가를 찾았다. 아무르 강가 죽음의 계곡에 섰을 때, 그는 불현 듯 2000년 전 예수가 떠올랐다.

 

“김알렉산드라도 예수처럼 강도범들과 함께 처형됐습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진가는 빛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이주민의 장녀인 그녀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도 아니었지요.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삶 자체에 강한 의지가 있었다고 보지는 않아요. 하지만 살면서 정체성을 스스로 깨닫고, 어느 순간 헌신하고 투신하는 삶을 살게 된 것 같습니다. 충분히 도망갈 수 있었는데도, 머뭇거리다가 백군에 붙잡혔지요. 이 같은 모습은 자기만을 위한 사람이 아닌, 이타적인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혁명가인 동시에 민족을 사랑한 사람의 모습을 김 알렉산드라한테서 본 것 같습니다.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의 전형이라고 생각했지요.”

 

두 번의 연해주 답사를 거치면서 김알렉산드라를 노래한 두 개의 시가 나왔다. 「아무르강의 붉은 꽃」과, 「김알렉산드라 소전」이었다. “연해주와 시베리아 대륙 마을마다/ 억압받는 이들을 위한/ 자유의 씨앗을 뿌리고/ 세상에서 가장 가련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겨레의 독립이라는/ 기적의 꽃을 피우고자 했던/ 그것이 이념이고 주의였고 전부였던/ 서른넷의 붉은 여인은/ 시베리아 붉은 대륙을 가르며/ 붉게 더 붉게 흐르는/ 아무르강 가장 깊은 곳에 잠들었다/ 골고다 언덕 예수의 최후처럼”(「김알렉산드라 소전」 부문)

 

시인 곽효환이 「김알렉산드라 소전」을 비롯해 68편의 시를 묶은 다섯 번째 신간 시집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문학과지성사)을 들고 돌아왔다. 전작 『너는』 이후 5년만이다. 모두 4부로 구성된 시집에는, 그가 지속적으로 써온 북방시(제1부)뿐만 아니라, 지구와 우주로 확장한 당대의 보편적 진실을 담은 시(2부)를 포함해 시인의 세계관(3부)과 서정시(4부)까지 다양한 층위의 시선과 마음이 담겼다. 근현대사의 뒤꼍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쓸어보고, 기억하고, 되짚어보려는 문학적 시선이 시집 전체를 관통한다.

‘북방의 시인’으로 불려온 곽효환이 다시 혁신해 형상화한 북방은 어떤 모습일까. 북방을 넘어서 남방과 지구와 우주, 동시대로 새롭게 확장한 시편의 풍경은 어떤 모습일까. 한국문학번역원장 직을 수행 중인 곽 시인을 지난달 8일 서울 강남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만났다.

 

―「김알렉산드라 소전」을 비롯해 김알렉산드라를 노래한 시편이 두 편인데.

 

“김알렉산드라의 생애와 그녀가 갖는 의미를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서 두 편으로 나눠 쓰게 됐다. 「아무르강의 붉은 꽃」은 그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고, 「김알렉산드라 소전」은 그녀의 생애를 짧게 정리한 것이다. 가급적 수식어를 덜어내고 담백하게 그녀의 삶과 의미를 전달하려 했다.”

 

시인은 연해주 포시에트 지역의 지신허 마을을 찾아가선 1863년 조선인으로 처음 러시아로 이주한 최운보의 흔적과 마음을 더듬는다. “나는 조선에서 건너온 첫 번째 아라사 먹킹이요. 굶주림과 호위를 피해 두만갠을 건넜지만 나와 아바이와 큰 아바이의 고향은 북관이고 내 가슴엔 여전히 고된 조선의 피가 뜨겁게 흐르오만 목숨을 걸고 다시 뿌리내린 이곳이 나의 새로운 고향이오. 이제 내가 살던 집과 마랑은 사라지고 그 흔적마저 아숭쿠레하지만 나는 떠날 수 없소.”(「지신허 마을에서 최운보를 만나다」 부문)

 

만주의 가장 깊은 만주리아에선 이용악의 흔적을 찾아서 그의 마음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이용악은 대학원 시절 그를 북방의 시로 이끈 영웅. “다싱안링산맥 서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흘러 러시아와 옛 몽골을 가르는 어얼구나강/ 멀리멀리 북동쪽으로 돌아/ 마침내 헤이룽강이 되고 아무르강이 되는/ 국경이 되어 흐르는 물길 앞에 서다/...국경의 강안에서 나는/ 차마 눈감지 못하는 사내를 본다/ 목숨을 건 삶들이 건너가고 건너왔을/ 지금도 계속되는 시름 많은 시대의 강가에서/ 터지는 울음을 애써 삼키는 북관의 사내를 보며/ 나도 운다”(「국경에서 용악을 만나다」 부문)

곽효환 한국문학번역원장./2021.08.12./하상윤 기자

―이 시는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2018년 윤동주의 흔적을 답사한 뒤 헤이룽강을 따라서 만주리아로 올라갔다가, 다시 북경으로 내려왔다. 만주리아에서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국경이 갈렸다. 이용악이 말하는 「국경」의 개념이 이런 것이었겠나, 하고 생각했다.(이용악은 시 「국경」에서 ‘폭탄을 품은 젊은 사상이 피에로의 비가에 숨어 와서 유령처럼 나타날 것 같’다고 노래했다.) 저는 대학원 때 이용악을 공부하다가 가슴이 뜨거워 잠을 자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이용악의 시 「북쪽」을 접하면서 북방 연구를 하게 됐다. 그곳에서 이용악이 생각하던 국경, 시대적인 고난, 시름에 관한 문제 등을 생각하면서 ‘폭탄을 품은 젊은 사상이 유령처럼 나타날 것 같’은 국경 느낌을 재현해 보려고 했다.”

 

북방을 종회무진 더듬었던 시인은 지구적이고 동시대적인 성찰로도 나아간다. 시 「8분 46초」는 2020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에 의해 압사해 숨진 사건을 정면으로 겨눈 작품이라면, 「넘버 스리」는 1969년 달에 최초로 착륙한 아폴로 11호에 탑승했음에도, 닐 암스트롱이나 버즈 올드린과 달리 지구와의 교신을 위해 달의 표면을 밟지 못한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 이야기다.

 

“나는 넘버 투를 넘보는 넘버 스리가 아니에요/ 자장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하지도/ 배신을 불사하는 불멸의 불사조를 꿈꾸지도 않았어요/ 더욱이 내 아내는 시를 쓴다고 랭보와 바람이 나지도 않은 걸요//...우리 세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나기였어요/ 우리는 각각의 삶을 살았고/ 나는 그날 이전에도 이후에도 단 한 번도 넘버 원이 아닌 적이 없어요/ 나는 최선을 다한 내 생의 영웅이었으니까요”(「넘버 스리」 부문)

 

―시는 구분 짓고 가치를 부여하는 기존 인식에 대한 전복으로 읽히는데.

 

“사람들은 늘 넘버 원만 기억하고 넘버 스리를 잊거나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마이클 콜린스를 통해 넘버 스리처럼 보이지만 다른 이들이 못 본 것을 봤다고, 넘버 스리였기 때문에 한 번도 불행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1등만 지향하는 세상과 통념을 전복하고 싶었다. 실제 삶을 봐도 가장 많이 알려진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불행했지만, 콜린스는 가장 순탄한 삶을 살았다.”

 

시인은 시집 곳곳에 여로에서 경험했거나 깨달은 사유를 펼쳐 보이기도 한다. 어느 날 지친 걸음을 이끌고 한 산사의 미륵전에 들어섰다가 만난 사람들의 꿈과 희망, 소망, 그리고 사유도 담겨 있다.

 

“타박타박 지친 걸음으로/ 미륵전에 들었다/ 언젠가는 올 것이나 당대에는 결코 오지 않을/ 미륵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한 시대를 건너고 한 생을 건넜을/ 뭇사람들의 그림자/ 키 큰 미륵불을 모신 삼층 법당에 어른거린다/ 그 검은 그림자들 사이에서/ 오기로 했고 올 것이고 오고야 말/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어쩌면 끝내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리는/ 산사에 봄눈 분분히 흩날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비워두는 것이고/ 비워둔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일진대/ 담박하게 너른 마당을 홀로 지켜온/ 늙은 산사나무가 기다리는 이는 누구일까/ 눈 수북이 쌓인 가지마다/ 맑은 눈물 똑똑 흘리면서”(「미륵을 기다리며」 전문)

―왜 사람은 미륵을,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가.

 

“절 구경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지방에 가면 절 같은 곳을 자주 간다. 원래 기독교도였는데, 나이가 먹어서 무교가 되더니 요즘에는 불교가 좋아졌다(웃음). 어느 절이었는지 모르겠지만, 3층 법당에 미륵전이 있었다. 법당에 들어가는 순간, 문득 미륵을 희망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지금은 희망이 없지만 언젠가는 희망이 올 것이라는 바람, 아직 오지 않았고 어쩌면 끝내 오지도 않을, 그럼에도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게 우리 삶 아닌가. 안 왔고, 안 올 것이고, 끝끝내 안 오겠지만, 그래도 미륵을 기다리는 게 우리 의지일 것이다. 제 시적 가치관이기도 하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해주고 싶은 얘기였다.”

 

서해안 해변가에서 곰솔 숲을 보고선 바람을 견디는 힘을 생각하고, 한발 더 나아가 배가 돼 바다로 나아가는 비약을 꿈꾸기도 한다. “곰솔은 소나무 숲에 들지 않고/ 소나무 또한 곰솔숲에 들지 않는/ 분서의 삶을 생각하며/ 그 중심에 자리한 견딤과 절제를 어림한다// 오늘 밤 곰솔 한 그루 베어 작은 배 한 척 만들고/ 송진으로 틈새를 촘촘히 메우고 덧칠할 것이다/ 그리고 제 몸에서 토해낸 슬픔이 다 마른 날/ 먼바다로 천천히 나아갈 것이다”(「바람을 견디는 힘」 부문)

 

―곰솔로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아가는 대목은 놀라운 비상의 순간인데.

 

“팬데믹 전, 서해안 안면도에 갔다 와서 쓴 것 같다. 안면도 쪽에 가면 소나무 숲이 반듯반듯하게 올라와 있다. 그곳을 산책하면서 착상이 떠올랐다. 시련을 견딘다는 것은 반드시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통해 더 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발상이다. 나무 안에 있는 습기가 다 마르면 새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저는 우리 시나 음악이 점점 사변화돼 가는 경향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제 문학관이 낡은 탓도 있겠지만, 문학 작품은 공감의 폭이 넓어야 된다. 독자와 작가 사이의 교감 폭이 넓어야 한다. 공감의 폭이 좁아질수록 문학은 점점 소외되는 것 같다.”

 

시집의 끝은 점점 서정으로 치닫는다. 심지어 투쟁, 하며 손이 올라갈 것 같은 전태일 이야기마저. 서정적이어서 오히려 깊게 올릴 지도. “바람 찬 이른 아침, 인적 드문/ 모전교와 광통교 사이 어디에서/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는 빈자리를 봅니다// 더 이상 내 곁에 없는 당신,/ 들어갔던 길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나오는 길 또한 알 수 없습니다// 세상이 멈춘 듯 우두커니 서 있는/ 왜가리 한 마리 앞에 서서/ 당신과 함께 걷던 날들을 생각합니다// 흐르는 것들은 모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가슴 속 깊이 고인 슬픔의 물꼬를 열어/ 조금씩 떠나보내는 실개천 같은 것인가 봅니다// 올해 가을은 일찍 왔고 늦게까지 머물다 갔습니다”(「청계천」 전문)

 

―전태일 이야기인데, 이렇게 서정적이어도 되나(웃음).

 

“전태일이라고 쓰고 싶지 않았다. 저는 전태일이지만, 전태일이라는 말을 빼면 독자들은 전태일 대신에 다른 누구라도 갖다 놓을 수 있다. 그게 시의 힘이다. 존경한다, 멋있다고 말하는 것은 더 이상 존경스럽지도 멋있지도 않은 것처럼,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호명하지 않음으로써 더 넓게 만들어준다. 일부 평자는 저를 서정적 리얼리스트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서정의 극점을 한번 보여주고 싶었다.”

 

―이번 시집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두 번째 시집부터 북방 이야기를 해왔다. 제 시에서 북방은 시원, 사랑, 궁극의 동의어였다. 전주 사람이 본의 아니게 ‘북방의 시인’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앞으로 북방 이야기를 안 한다고 단언하긴 어렵겠지만, 이번이 거의 완결편인 것 같다. 당초 구상했던 것의 90% 정도 쓴 것 같다. 하나는 결산의 의미가 있고, 두 번째로 보편적이고 더 넓은 세계로 나가기 위한 도전의 의미도 있다. 마지막으로 시적 서정을 극한까지 밀고 가고 싶었다. 잘나고 이름 있는 사람들이 아닌 힘없고 나약하지만 순간순간 울음을 삼키면서 버텨내고 이겨낸 사람들이 우리 역사나 삶을 이어왔다. 그들을 기억하고 손을 내미는 의미로 표제를 정했다.”

 

“무슨 책을 읽고 있어?” 어느 날, 문학 비평을 하던 국어 선생이 다가오면서 물었다. 문학이 저렇게 매력적이구나, 하는 느낌을 줄 정도로 매력적인 교사였다. 짝궁은 대답했다. “최인훈의 『광장』을 읽고 있습니다.”

 

국어 선생은 급 관심을 표하면서 짝궁 앞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은 한동안 다감한 표정으로 소설을 소재로 대화를 이어갔다. 강남 8학군 소속 영동고 2학년생 곽효환은 그날 하교 길에 서점에 들렀다. 최인훈의 소설 『광장』을 샀다. 읽기 시작했다. 문학이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구나.

 

국문과로 진학한 그는 대학교 1학년 때 시인 김수영을 만났다. 이때 시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대학신문사 문학상에 매년 시를 응모했다. 당선되지 못했다. 대신 4학년 때 평론 「김수영 연구―참여문학정신 중심으로」가 당선됐다. 시인 곽효환의 원점이었다.

 

1967년 전주에서 태어나고 서울에서 자란 곽효환은 1996년 『세계일보』 지면에 시 「벽화 속의 고양이 3」을, 2002년 계간지 『시평』에 「수락산」 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인디오 여인』(2006), 『지도에 없는 집』(2010), 『슬픔의 뼈대』(2014), 『너는』(2018) 등을, 연구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2008)과 시 해설서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2014) 등을 출간했다. 애지문학상, 편운문학상, 유심작품상, 김달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시 세계를 조금 설명해 달라.

 

“첫 시집 『인디오 여인』에서 중점을 둔 것은 탈경계의 상상력이었다. 국가와 민족, 종교 등 경계를 만들고 경계 안에 가두려는 것은 20세기 산물이라고 생각했고, 그 경계를 뛰어넘는 서사와 사유에 도전하려 했다. 세계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사유한 내용을 담았다. 두 번째 시집 『지도에 없는 집』에선 근원적 민중성에 대해 도전했다. 정치적이고 외형적인 것을 다 덜어낸 민중의 원초적인 것이 뭐가 있느냐, 그것을 파고들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시집에선 북방이 주요한 화두가 된다. 대학원 시절 공부하면서 이용악 시인을 읽었는데 뜨겁게 차올라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경험을 했다. 살펴보니 이용악과 백석, 김동환은 한반도에서 사라졌던 북방이라는 공간의 상상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두만강에서 압록강을 중심으로 하여 사는 사람들의 삶과 서사, 이들의 고난, 이들의 이야기의 기원과 사유.... 박사학위 논문도 김동환 이용악 백석 등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연구」였다. 관련 연구서도 3쇄까지 찍었다. 이런 공부를 하면서 북방이라는 것이 시적 중심으로 딸려 들어왔다.”

 

―왜 북방인가.

 

“우리 민족은 먼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북방이라는 건 곧 기원, 시원, 사랑, 궁극의 동의어다. 우리 민족은 북방에서 여러 민족들과 섞여 살면서 때로는 강성했고 약할 때에는 협력하며 어울려 살았다. 북방은 우리만 살았던 게 아니라 여러 민족이 경쟁하고 협력하며 살았다. 고구려, 발해 시절의 북방은 우리 땅이 아니라 우리가 주도적으로 다른 민족과 조화롭게 협력하고 살면서 이뤄낸 제국이었다. 그런 면에서 북방이 주는 의미는 크다. 단일 민족으로 지배하는 게 아니라 여러 민족의 리더가 돼 협력하고 공존했다. 북방하면 고구려, 발해만 생각하고 회복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우리 집 앞으로 한 사람이 울면서 찾아와 몇 십 년 전 자기 집이라며 되찾아야 한다고 말하면 얼마나 끔찍할 것인가. 옛날에 내 집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북방은 고대사에선 영화로운 공간이지만, 고려, 조선 시대에는 연고권을 잃고 내려온 시기였다. 정치적으로 빼앗겼지만 우리 민족에겐 여전히 삶의 공간이고 살아온 공간이었다. 근대사에선 철저히 수난의 공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땅을 잃고 북방, 즉 만주나 연해주로 떠났고, 거기에서 또다른 고난이 시작됐다. 분단되면서 북방이라는 공간과 상상력을 잃어버렸다. 휴전선에 가려서 우리는 섬처럼 좁게 살고 있고 상상력마저 잃어버렸다. 일제 때만 해도 경성역은 국제역이었고,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로 갈아타고 유럽 헤이그까지 갔다. 우리가 온전한 한 민족이 되기 위해선 북방에 대한 상상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서 북방을 천착하는 시를 썼다. 그건 북방에 대한 상상력을 회복하고 되돌려놓은 작업이었다.”

 

―시 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원칙이나 방법이 있다면.

 

“독자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되, 문학 작품은 적어도 한 시대나 한 집단의 삶의 지형도 같은 것이어야 된다. 시대 또는 집단의 삶의 모습이 어떤 것이었고, 그때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이나 사유가 어떤 것이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유년의 우상인 프로레슬러 김일은 수세에 몰리다가도 벼락같은 박치기로 경기를 뒤집곤 했다. 전남 고흥 출신인 그는 당시 일본에서 이름을 떨치던 재일 동포 역도산을 동경해 무작정 일본행 밀항선을 탔다. 우여곡절 끝에 역도산을 만났지만, 역도산은 김일이 체구도 별로 크지 않고 특별한 기술도 없다며 박치기나 하라고 말했다. 김일은 하루에 수백 번씩 새끼줄을 칭칭 동여맨 나무 기둥에 머리를 박았다. 박치기로 레슬링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년에 일생에 가장 하기 싫었던 건 박치기였다고, 박치기를 할 때마다 머릿속에서 윙윙 하고 울렸다고 그는 술회했다. 제가 시를 쓴다는 것은 마치 김일의 박치기 같은 것이다. 가장 잘하는 필살기지만, 동시에 가장 하고 싶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취미가 아니라 한 생을 걸고 하는 것이다.”

 

오전 5시 45분쯤 일어나 한 시간 정도 운동으로 하루를 여는 시인 곽효환은 철저한 ‘이중 생활자’다. 즉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주중에는 한국문학번역원장으로 맹렬하게 살아가고, 주말엔 시인으로 변신해 조용히 책을 읽고 글을 쓴다. 물론 번역원장 처음 8~9개월 동안 아예 시 한 편도 못 쓸 정도로 바빴지만. 마지막까지 번역원장 직무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그는 한 명의 시인으로 어딘가를 걷고 더듬고 있을 것이다. 소리 없이 울다간 모든 사람들을.

 

“매화 향기 남은 자리에/ 벚꽃 분분히 날린 다음/ 모가지를 떨군 동백꽃/ 홍건히 잠겨 흘러가는 실개울/ 수척한 빈산 노거수 그늘에 들어/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을 더듬는다”(「소리 없이 울다간 사람」 중에서)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사진=세계일보 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