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설왕설래] 품격 있는 인사청문회

“미국의 의회 문화를 갑자기 받아들이다 보니 청문회를 운영하는 국회 입장에서나 피청문인이나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적절치 못한 일들이 국민의 눈에 비쳐졌다.” 2000년 6월 우리 헌정 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인사청문회를 마친 이한동 전 국무총리의 소감이다.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된 인사청문회에서 재산 형성 과정과 국정 운영 능력, 도덕성 등을 추궁하는 송곳 질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첫사랑에 관한 에피소드는 뭐냐”는 등의 황당 질문이나 후보자를 치켜세우기 급급한 홍보성 발언도 적잖았다.

이 전 총리 언급대로 인사청문회는 미국의 제도다. 1787년 미국 연방헌법 제정 당시 고위공직자 임명권을 상원에 줘야 한다는 주장과 대통령이 전적으로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타협한 결과다.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이 인준한다’는 헌법 2조2항은 인사청문회의 법적 근거다. 미 대통령은 6000여명에 대한 임명권을 지니는데, 차관보급 이상 고위직과 연방 대법관, 검사, 대사 등 1200명은 상원 인사청문회를 거쳐야 한다. 군 장성도 대상이지만 관례적으로 4성 장군 이상 59명에만 적용된다.

인사청문회가 우리 공직사회에 가져온 변화는 긍정적이다. 어지간한 흠결이 있으면 고위공직자로 나서기가 힘들어졌다. 자신과 가족의 부동산 투기와 병역 비리, 탈세 등은 물론이고 논문 표절이나 갑질, 자녀 학교폭력까지 심판대에 오른다. 공직자가 장·차관까지 올라가려면 미리 자신을 관리해야 하는 게 상식이다. 능력 있는 인사들이 인사청문회장에 서는 걸 꺼려 공직 제의에 손사래를 치는 사례도 많다. 요즘 요직의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모 인사가 그런 사례다.

정치가 보수와 진보로 극단화하면서 인사청문회 취지가 퇴색한 건 아쉽다. 후보자 능력과 자질, 비전을 검증하기보다 무차별적 신상 털기 경연장이 되기 일쑤다. 인사청문 후 야당의 보고서 채택 비협조 또는 임명동의안 부결, 대통령의 임명 강행은 공식이 되고 있다. 그제 끝난 조희대 대법원장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는 모처럼 사법정책에 대한 질의와 응답으로 품격이 있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대통령은 능력 있는 후보를 내세우고 국회는 청문회다운 청문회를 진행하는 모습을 더욱 자주 봤으면 하는 바람은 우리 정치에서 헛될까.


박희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