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는 디지털 마크입니다. 마크 투안의 훨씬 더 잘생긴 디지털 쌍둥이죠. 사실 농담이에요.”
케이팝 보이그룹 갓세븐의 멤버 마크 투안의 얼굴과 목소리를 그대로 구현한 이 가상 인간은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팬이 말을 걸면 표정과 음성으로 직접 대답하고, 거대언어모델(LLM)을 기반으로 대화를 학습하고 진전시킬 수도 있다. 그는 뉴질랜드 스타트업 소울머신스가 제작한 마크의 ‘디지털 트윈’, 즉 실존 인물을 가상 세계에 구현한 존재다.
◆고도화되는 ‘가상 인간’ 기술
인공지능(AI) 기술이 단순한 텍스트 처리를 넘어 음성, 이미지, 영상 등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를 처리할 수 있도록 진화하면서 가장 격변이 예상되는 분야 중 하나가 연예계다.
세계적인 스타들은 일찍부터 AI의 도움을 받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의 상징적 존재 ‘다스 베이더’의 성우 제임스 얼 존스이다. 올해 92세가 된 존스는 지난해 다스 베이더 역할을 그만두면서 제작사인 디즈니가 AI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복제해 향후 속편 등에 사용하는 데 동의했다.
하지만 AI 기술은 단순한 목소리 복제에서 멈추지 않고 가상현실에서 하나의 온전한 사람을 구현하는 데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 소울머신스 또한 마크 외에 종합격투기 선수 프란시스 은가누, 미국의 전 농구선수 카멜로 앤서니, 전설적인 골프 선수 잭 니클라우스의 디지털 트윈을 제작했다. 니클라우스의 ‘쌍둥이’의 경우, 현재 83세인 골퍼 본인의 요청으로 38세의 자신을 복제했다.
그레그 크로스 소울머신스 대표는 “마크가 디지털 트윈이 생겼다는 내용을 발표하자마자 수만 명의 팬이 ‘디지털 마크’에게 말을 걸었다”며 “스타들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열렬하게 따르는 팬층이 있기 때문에 (디지털 트윈은) 그들이 팬 커뮤니티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이 될 것”이라고 지난달 스페인 일간 엘파이스에 밝혔다.
평소라면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소통의 한계를 느끼던 팬들도 LLM인 GPT-3를 사용하는 ‘마크 쌍둥이’와는 원하는 언어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 엘파이스는 이런 디지털 트윈 기술이 “팬과 연예인의 관계를 바꿔놓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소울머신스는 유명인을 디지털 트윈으로 복제하는 것 외에도 다양한 용도의 가상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이 회사의 ‘디지털 DNA 스튜디오’를 사용하면 누구나 디지털 인물을 생성하고 사용할 수 있다. 이를 활용하면 온라인 쇼핑 사이트에서 고객의 질문에 답하는 상담원을 만들 수도 있고, 현실세계에 원본이 없는 온전한 가상의 인플루언서를 만들 수도 있다.
◆디지털 트윈, 할리우드의 뜨거운 감자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인 미국 할리우드에서도 이 같은 AI 기술을 빠르게 도입하고 있다. 지난달 8일(현지시간) 약 4개월간의 파업을 마친 할리우드 배우·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이 영화·TV 제작자연맹(AMPTP)과 도출한 잠정 합의안에서도 마지막까지 논란이 됐던 것이 디지털 트윈과 가상 인간 사용에 관한 조항이었다. 배우조합은 협정 비준에 성공했지만, 실제로 이사회 14%가 반대표를 던졌을 정도로 우려가 컸다.
합의안은 할리우드에서 사용되는 디지털 트윈을 크게 두 가지로 정의했다. 전자는 배우를 스캔해 만든 것으로, 실질적인 배우의 고용이 필요하기 때문에 큰 제약이 없다. 후자는 배우의 목소리와 초상만을 사용해 스캔 없이 배우와 닮도록 조형한 것인데, 제작사가 인건비 절감을 위해 이를 남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배우조합은 각 배우가 디지털 트윈이 수행한 작업에 대해 통상 지급받았을 일급여를 보장받는다는 조건을 붙였다. 디지털 트윈으로 통상 5일 일했을 분량을 이틀 만에 촬영했더라도, 제작사는 5일치 급여를 지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디지털 트윈은 모두 제작·사용 전에 배우의 동의를 얻어야 하며, 복제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계약에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명시해야 한다.
해당 합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저스틴 휴즈 로욜라법대 교수는 지난달 로스앤젤레스타임스에 실은 기고문에서 “이번 합의는 디지털 대체품의 제작 및 사용에 대해 근로자의 동의를 의무화하고 이들의 임금을 보장한 획기적인 계약”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배우조합 협상위원회 고문인 배우 저스틴 베이트먼은 이번 합의안에 제작사들이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고 지적했다. 제작사가 “사진·음원이 대본대로 실질적으로 유지되는 한” AI 사용에 대한 별도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예외 조항 등 합의안 전반에 걸쳐 모호한 표현이 많다는 것이다.
베이트먼은 합의안에서 언급된 ‘합성 연기자’를 가장 큰 문제로 꼽았다. 합의안에 따르면 합성 연기자란 실제 인물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지만 인간처럼 보이도록 만든 AI 생성물로, 제작자들은 실제 배우가 합성 연기자와 배역을 두고 경쟁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면 이 같은 AI 연기자 사용을 제한받지 않는다.
하지만 AI 생성물이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무척 모호하다. 일례로 AI 연기자가 배우 스칼릿 조핸슨과 이목구비는 닮지 않았지만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금발 헤어스타일로 실존 인물을 연상시킬 수 있다. 이 경우 제작사가 배우에게 AI 사용에 대한 고지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지 판단하기란 무척 어렵다.
데이비드 건켈 노던일리노이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지난달 영국 주간지 와이어드에 “디지털 트윈과, 복제품에 가깝지만 엄밀하게 복제품은 아닌 유사품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다”며 “(합의안의) 계약 조건에 잘 정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경계를 시험하기 시작하면서 앞으로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소송을 제기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AI 배우로 양극화 심화 우려도
디지털 트윈, 그리고 AI 연기자의 도입으로 스타와 무명 배우 간의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라고 와이어드는 전망했다. 디지털 트윈은 유명 배우가 동시에 여러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 있게 해 주는 반면, 무명 배우는 며칠 일당만 받고 이미지를 가져다 사용하는 식으로 비용 절감의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와이어드는 “AI 복제 동의가 언젠가는 배우들의 고용 조건이 될 수도 있다”며 “AI 프로젝트를 거부할 여유가 있는 배우들은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생활비를 고민해야 하는 연기자들은 여전히 착취당할 위험에 놓여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올해 6월 개봉한 미국 히어로 액션영화 ‘플래시’에 단역으로 출연한 배우 프린스 로열은 그가 360도 이미지 스캔에 동의하거나 무급으로 귀가해야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디지털 트윈이나 합성 AI 연기자가 실제 배우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에 따르면 단편 영화 ‘헬멧시티’에서 생성형 AI가 작품 전체를 만들 수 있는지 실험 중인 자멜 레이놀즈 감독은 AI 이미지 합성 기술이 상당히 발전했음에도 아직까지는 “불쾌한 골짜기가 남아 있는 수준”이라고 진단했다. 현존 AI 기술로 만든 배우는 그 어색함 때문에 시청자들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골짜기를 돌파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미국 분석기업 루시드웍스가 지난 5~7월 미디어 업계 직원 6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에 따르면 AI 의사결정권자의 96%가 향후 12개월 내 생성형 AI 기술에 대한 지출을 늘릴 계획이라고 답했다.
거대 종합 미디어 기업 디즈니는 지난 8월 AI 전담 전문가 조직을 구성해 회사 전체에 걸쳐 기술 활용 방안을 구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베이트먼은 “AI는 인간 배우를 충분히 모방할 수 있고, 그 기술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다”고 X(옛 트위터)에 밝혔다. 그는 “몇 년 안으로 우리는 실제 배우에게 굳이 돈을 줄 필요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며 “나는 이것이 실존적 위협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