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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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완규의한·미동맹사] ‘국방과학연구소’의 창설과 방위산업의 태동

대한민국의 방위산업은 원조와 수입으로 시작해 지난해 173억 달러를 수출하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새로운 역사를 써 가고 있다. 정부는 지난 12월 7일 ‘제2차 방산수출전략회의’에서 2027년까지 세계 4대 방산 강국 도약을 목표로 하는 ‘지속 가능한 방산 수출 추진 전략’을 발표했다.

 

6·25전쟁 이후 미국은 군사지원사업(MAP: Military Assistance Program)과 해외군사판매사업(FMSP: Foreign Military Sales Program)을 통해 한국군에 대해 기본적인 재래식 무기체계들을 지원했다. 이로 인해 한국 정부는 1960년대 중반까지 국내 방위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68년부터 1·21 청와대 기습미수사건, 푸에블로호 피랍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등 빈번한 북한의 도발과 군사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9년 닉슨 독트린 발표와 주한 미 제7사단의 철수 등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하자, 심각한 안보 위기를 인식한 박정희 대통령은 자국 국방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70년 8월 6일 ‘국방과학연구소(ADD: Agency for Defense Development)’를 창설하며 본격적인 국내 방위산업 육성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971년 6월 미국은 기술지원단을 한국에 파견하여 1주일간 국방부, 국방과학연구소 그리고 몇몇 방산업체를 방문하여 한국 방위산업의 기술 수준과 지원 사항을 조사했다. 이들의 건의로 1971년 7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4차 한미안보협의회의(SCM)에서 한국의 방위산업 발전을 위한 기술지원 합의가 이뤄졌다. 이에 따라 1972년 1월 7일 미 국방부의 고등연구계획처(ARPA: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후에 DARPA로 개칭)에서 클라이드 하딘(Clyde D. Hardin)을 단장으로 탄약·기동·전자 및 통신·함정 등의 기술자 5명으로 구성된 기술지원단이 국방과학연구소에 파견하여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씩 상주하며 두 가지 차원의 기술지원 업무를 수행했다. 

국방과학연구소 전경.

기술지원 업무 중 첫째는 1963년에 체결된 “기술자료 교환협정(DEA : Data Exchange Agreement)”의 부록에 근거하여 한국이 개발, 생산하고 있는 무기체계에 대한 ‘기술자료 패키지(TDP: Technical Data Packages)’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1975년에 체결된 “과학자 및 공학자 교환프로그램(SEEP: Scientists and Engineers Exchange Program)”을 통해 국방과학연구소 및 방위산업체의 연구원이 미국 연구소에서의 기술 연수를 받을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1970년대 초반 한미동맹을 통한 미국의 대한(對韓) 유·무상 군사지원은 한국의 방위산업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의 무상 지원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기본 재래식 무기체계를 양산해 전력화시키는 데 공헌했고, 유상 지원은 방위산업 기반 체제를 구축 및 공고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최완규 육사 외래교수·경제사회연구원 국방센터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