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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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오지의 마당나무 ‘엑셀사 커피’ [박영순의 커피언어]

커피에는 때가 있다. 한 잔을 손에 감싸고 향미가 좋게 느껴지는 온도를 기다린다. 수확철이 다가오면 등불을 든 열 처녀의 심정으로 제철 커피를 간절하게 마음에 그린다. 품종에서 벌어지는 ‘커피 기다림’은 기약 없는 고통이자 알 수 없는 희망이다.

아라비카(Arabica), 카네포라(Canephora), 리베리카(Liberica), 엑셀사(Excelsa) 등 주요 4대 종은 제각각 굴곡이 있다. 1870년대 커피 녹병이 극성을 부려 아라비카가 멸종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 때 콩고와 가봉 사이를 흐르는 코이루(Kouilou)강 밀림에서 로부스타(카네포라)가 발견됐다. 카페인을 많이 품은 덕분에 병충해를 이겨낸 로부스타는 그러나, 위기를 벗어나자 맛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괄시받았다.

 

라오스 볼라벤에 있는 오지의 한 농가 마당에서 자라고 있는 엑셀사 커피나무.

1990년대 커피도 와인처럼 테루아(terroir)를 감상하자는 스페셜티 커피 운동이 번지면서 ‘아라비카 유아독존의 광풍’이 불어닥쳤다. “고산지대에서 재배되는 아라비카 커피가 아니면 모두 싸구려다”라는 그릇된 인식이 퍼졌다. 재배지에서도 더 비싸게 받을 수 있는 아라비카에 매달렸고, 몰려드는 주문을 감당하기 위해 생산량 증가에 몰두했다.

이러한 분위기가 압도하자, 우간다와 북구 앙골라에 이르는 서부 열대 아프리카에서 자생하던 리베리카는 선택받지 못하고 잊혀 갔다. 리베리카의 변종으로서 벨기에 식물학자의 이름이 붙은 드웨브리(dewevrei)도 탁월함을 뜻하는 ‘엑셀사(Excelsa)’로 불리기는 했지만 끝내 사랑받지 못했다.

“존재자의 존재에 응답하여 이야기하라”는 하이데거의 일갈은 리베리카와 엑셀사에 대해서는 적용되지 않을 듯 보였다. 아라비카의 들러리일 뿐 슬픈 품종들…. 가치를 지닌 존재도 있다는 게 진실에 더 가까운 것일까?

지난 13일 라오스로 향하는 커피 순례의 첫걸음은 이런 의문에 눌려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비엔티엔, 그곳에서 남쪽으로 팍세까지 비포장길 12시간. 엑셀사의 존재를 만져 보고픈 마른 갈망은 머뭇거림 없이 오지로 향하게 했다. 디디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낡은 나무다리를 예닐곱 건너, 새도 넘기 힘들어 보이는 고개를 또 예닐곱 넘어 한 노승이 선 채로 매장됐다는 전설의 마을에서 엑셀사를 조우했다. 한국을 떠난 지 꼬박 70시간. 엑셀사를 본 찰나, 존재자의 가치를 인간의 입장에서 따진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냐는 꾸짖음이 머리를 스쳤다.

허름한 농가의 한쪽에, 마치 우리네 토담집 위로 주욱 올라간 감나무처럼 엑셀사는 무심하게 서 있다. 나무기둥에는 빛바랜 검은 해먹이 흔들렸다. 마당으로 불쑥 들어간 나그네를 맞이하러 뛰쳐나온 아낙네는 그곳에서 누워 푸른 하늘을 서핑하고 있었으리라….

얼굴만큼 큰 잎새들을 들추며 덜 익은 청포도처럼 마디마디 맺힌 커피체리를 봤을 때 왈칵 눈이 쏟아질 뻔했다. ‘이름보다 귀한 네가 그냥 마당나무로 살고 있었구나.’ 주인은 이번에 커피를 수확하고 베어 버리겠다고 했다. 몇 바구니 안 되는 커피 열매를 로부스타에 섞어 내다 팔기보다 카사바를 심어 조합에 넘기는 것이 더 수지타산이 맞는다며 앙다물었다.

마을 사람들이 몰려들어 곧 마당토론이 벌어졌다. 주제는 ‘엑셀사 벨 것인가 말 것인가’였다. 지구온난화로 2050년 아라비카가 멸종될 것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리베리카와 엑셀사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주민들은 8㏊의 산림에서 엑셀사를 10t 정도 수확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 사 간다면 재배를 늘리겠다는 구두 약속을 했다. 엑셀사가 존재 가치를 드러내는 시기가 눈앞에 와 있다. 존재 가치란 때론 시간의 함수이다.


박영순 커피인문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