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업계의 나폴레옹, 세계를 석권한 와인 마법사, 블렌딩의 왕, 최초의 플라잉 와인메이커. 세계에서 몸값이 가장 비싼 천재 와인양조 컨설턴트 미셸 롤랑(Michel Rolland). 그에게 붙는 화려한 수식어는 끝이 없다. 당연하다. 수많은 유명 와인들이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고 현대 와인 양조의 기틀을 만들어 전 세계 와인의 품질을 대폭 끌어 올린 이가 바로 롤랑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인 지난 24일 76살 생일을 맞은 거장의 발자취를 따라 예술과 과학이 어우러지는 깊고도 오묘한 와인 양조의 신비한 세상을 탐험한다.
◆와인 900여종 만든 ‘양조의 신’
14년 만에 한국을 찾은 롤랑의 얼굴은 사진과는 달리 이제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하지만 7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도 한 해 수백 개 와이너리를 오가며 와인 양조를 진두지휘할 정도로 열정은 식지 않았다. 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 1등급 샤토 라피트 로칠드, 샤토 마고를 비롯해 미국 유명 컬트와인 할란 에스테이트 등 그가 양조에 관여한 와이너리는 23개국 250여개에 달한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역작 세 가지만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제가 만든 와인이 900개가 넘는데 그중에서 3개를 뽑으라는 것은 너무 가혹하네요. 나머지 와인은 적이 될 수 있으니까요. 하하.” 롤랑은 자신이 만든 와인 중 저렴하지만 품질이 좋은 와인도 있어 꼭 값비싼 와인이 자신의 역작이라 할 수는 없단다.
그는 대신 가장 기억에 남는 와인 컨설팅으로 인도를 꼽았다. “1993년 처음 인도에 갔는데 제대로 된 포도나무를 찾기 힘들 정도로 와인의 불모지였어요. 당연히 와인 마시는 문화도 거의 없었고 셀러를 관리할 수 있는 전문 인력도 찾기 어려웠죠. 특히 포도나무가 쉬어야 하는 휴면기, 즉 겨울이 없고 토양도 포도나무를 재배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사실상 와인을 만들기 불가능한 곳이었죠. 하지만 20년 가까이 여러 인도 와이너리를 컨설팅해 마실 만한 와인을 만드는 데 성공했어요. 그중 한 와인 이름이 그로버(Grover)인데 마셔보고 맛없으면 전화주세요.” 역시 거장답게 자신감이 넘친다.
◆와인 DNA 지니고 태어난 천재 양조가
롤랑이 와인 양조의 거장이 된 배경이 있다. 와인 양조 DNA를 지니고 태어난 덕분이다. 그의 부친이 프랑스 보르도 우안의 유명한 산지 포므롤의 소규모 가족 경영 와이너리 샤토 르 본 파스퇴르의 오너이자 와인메이커였다. 특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중 하나인 샤토 페트뤼스와 불과 300m 떨어진 곳이라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포도밭에서 뛰어 놀고 관찰하며 자연스럽게 와인과 호흡했다.
그는 포도재배·와인양조학교 투르 블랑슈와 보르도와인양조연구소에서 포도재배와 와인양조를 공부했다. 당시 스승이 현대 양조의 선구자 에밀 페노 등이다. 롤랑은 1976년 아내와 함께 고향인 리부르느에 와인양조연구소를 설립해 본격적인 와인 양조의 길로 나섰다. 이 연구소는 현재 400개가 넘는 와이너리와 계약을 맺고 양조 컨설팅을 제공하는 연구소 롤랑&아쏘시에로 성장했다. “제가 공부할 때만 해도 좋은 와인메이커가 거의 없었고 양조학 자체도 존재하지 않았어요. 와인을 만드는 전통만 있고 기술은 없던 시기였죠. 포도 재배도 느낌으로 했을 정도로 주먹구구식이었답니다. 당연히 생산자들이 ‘포도 완숙’이라는 단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죠. 지금은 포도 완숙을 통해 훨씬 더 일관성이 있는 와인을 생산할 수 있게 됐답니다. 지난 50년 동안 와인 양조 기술은 엄청난 발전을 했어요. 좋은 포도알을 선별하는 소팅 작업을 하는 곳도 3%에 불과했지만, 1990년대부터는 거의 모든 곳에서 소팅을 하고 있죠. 최적의 온도로 발효하는 자동온도조절시스템 도입으로 전 세계에서 좋은 와인을 만들고 있답니다.”
◆와인의 시작은 테루아
롤랑은 1979년 부친이 작고한 뒤 샤토 르 본 파스퇴르, 샤토 롤랑 마예, 샤토 베르티노 생뱅상을 물려받아 경영을 이끌었고 1985년부터 보르도 와이너리를 시작으로 양조 컨설팅에 돌입했다. 프랑스 밖으로도 관심을 돌려 스페인 보데가 팔라시오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미국, 칠레,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23개국으로 컨설팅을 확장했다. 계절이 반대인 남반구와 북반구를 오가며 1년 내내 양조에 참여하는 ‘플라잉 와인메인커’의 시조가 바로 롤랑이다. 미국 컬트와인의 대명사 할란, 스크리밍 이글, 스태글린 패밀리 빈야드와 칠레 카사 라포스톨, 이탈리아 슈퍼투스칸 오르넬라이아, 오베르토, 몬테베로, 테누타 캄포 디 사쏘 등 그의 대표 작품들은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롤랑은 좋은 와인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테루아를 꼽는다. 그는 뛰어난 테루아를 찾아내 가장 완벽하게 잘 맞는 품종을 고르는 남다른 감각을 지녔다. “테루아는 좋은 와인 생산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샤토 페트뤼스, 샤토 라피트 로칠드, 로마네 콩티, 마세토가 왜 유명할까요. 그들은 마술사가 아닙니다. 좋은 포도가 있어야 좋은 와인이 만들어지고 좋은 포도가 있으려면 테루아가 굉장히 좋아야 합니다. 따라서 테루아는 바로 왕 같은 존재죠. 페트뤼스에서 200m만 떨어져도 테루아가 완전히 달라져 품질이 크게 차이납니다. 전 세계의 좋은 테루아를 선별해 좋은 와인을 만드는 것이 바로 저의 일이랍니다.”
칠레 클로 드 로스 시에테(Clos de Los Siete)는 이런 ‘테루아 프로젝트’를 통해 탄생한 대표 와인이다. 롤랑은 1999년 칠레 멘도사에서 가장 높은 와인 산지인 해발고도 1500∼3000m 우코밸리의 황무지 850ha를 사들여 말베크를 심었다. “당시 칠레 생산자들은 수요가 많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주로 재배했는데 품질이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말베크가 이 땅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간파했죠. 화산암 위에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자갈과 모래가 덮인 충적성 선상지로 배수가 잘 됩니다. 또 동향 포도밭은 차가운 바람이 적어 심한 서리 피해를 막을 수 있고 북향 포도밭은 일조량이 뛰어나 말베크를 재배하는 데 최적의 조건을 지녔답니다.”
땅 크기가 롤랑 고향인 포므롤과 맞먹어 보르도 6개 와이너리와 함께 땅을 매입, 숫자 7을 뜻하는 시에테로 와인 이름을 정했다. 2002년 첫 빈티지를 선보이자 와인평론가들은 “보르도 최고의 별들이 만나 아르헨티나에서 또 다른 별을 탄생시켰다”고 극찬했고 영국의 유명 와인매거진 디캔터는 ‘미래의 아이콘 와인 톱 10’에 클로 드 로스 시에테를 선정했다. 말베크 50% 이상에 메를로, 시라, 카베르네 소비뇽, 프티 베르도, 카베르네 프랑을 섞는 이 와인은 집중도가 매우 뛰어나다.
◆롤랑 이름 담은 ‘인생 역작’ R&G 탄생
롤랑이 2010년대 들어 눈을 돌린 곳은 첫 해외 컨설팅을 시작한 스페인이다. 롤랑은 1993년 설립된 스페인 프리미엄 와인 유통 그룹 아랙스 그랜즈의 설립자 하비에르 갈라레타(Javier Galarreta)와 손잡고 새로운 스페인 와인을 선보였는데, 바로 두 사람의 이름을 넣은 롤랑 갈라레타(Rolland Galarreta·R&G)다. R&G 프로젝트는 2010년 리오하 알라베사, 리베라 델 두에로, 루에다를 시작으로 2014년 프리오랏, 몬테네 데 톨레도, 헤레스 등 다양한 산지로 넓혔다. 현재 92ha 포도밭에서 평균 수령 25년 올드바인으로 와인을 생산한다. “스페인은 고향인 보르도에서 아주 가깝고 스페인어를 잘 구사할 정도로 좋아하는 나라여서 늘 스페인에서 좋은 와인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양한 프리미엄 와인 유통망을 지닌 갈라레타와 와인을 잘 만드는 제가 합작하면 큰 시너지를 낼 것으로 기대했는데 다행히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역시 좋은 테루아를 찾는 것이 프로젝트의 첫 단추로 유명 산지에서도 작지만 뛰어난 구획을 찾아내는 데 주력했다. 특히 그가 주목한 땅은 해발고도가 높고 일조량이 좋으며 일교차가 커서 포도가 신선한 산도를 움켜 쥘 수 있는 곳이다. 서늘한 기후에선 포도가 아주 천천히 완숙돼 맛과 향의 집중력이 뛰어난 와인이 탄생한다. “R&G 와인은 탄닌이 둥글둥글해 편하고 즐겁게 마실 수 있어요. 플래그십 아이코닉도 너무 묵직하지 않으면서 복합미와 미네랄이 뛰어나고 장기숙성도 가능합니다. 루에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화이트 품종 베르데호는 원래 전통적으로 산도가 굉장히 찌르는 스타일이에요. 저는 루에다 와인 생산 기준을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산도를 최대한 낮췄습니다. 10∼15%를 새 프렌치 오크에서 숙성하고 앙금 숙성을 더해 산도를 부드럽게 바꿨답니다. 루에다를 한정식과 페어링했는데 잡채, 불고기, 김치, 나물밥, 두부조림, 시금치 등과 아주 잘 어울리더군요.”
2016년부터 생산된 R&G 아이코닉은 무려 60년 이상 수령 템프라니요 95%에 가르나차, 그라시아노를 소량 블렌딩한 레드 와인으로 레드체리 등 과일향과 향신료가 피어나고 부드러운 탄닌과 뛰어난 밸런스가 돋보인다. R&G 엘도세는 유기농으로 재배한 시라 100% 레드 와인으로 2017년부터 2만병가량 소량 생산한다. 우아한 시라로 유명한 프랑스 북부 론 코트로티와 스타일이 흡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롤랑은 와인은 사람과 비슷하단다. “포도를 이해하는 것은 사람을 이해하는 것과 같아요. 첫 번째 만났을 때 그 사람을 절대 이해할 수 없듯, 포도를 이해하는 데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리죠. 한 가지 양조 방식을 적용할 수 없는 것도 와인을 만드는 어려움 중 하나랍니다. 스페인 리오하, 프랑스 포므롤, 미국 내파밸리 등 각 테루아에 맞게 양조 방식을 바꿔야 해요. 또 세월이 흐르면서 자동차, 비행기, TV, 전화기가 진화하듯, 와인 양조도 진화해야 하죠. 저는 지금도 이런 변화를 계속하고 있답니다. 요리법처럼 획일적인 방법으로 와인을 만든다면 아마 큰 실수를 낳게 될 겁니다.”
와인 양조와 컨설팅을 공부하는 후배들에게 항상 자연에 겸손하라고 조언하는 롤랑은 내년부터 남미 우루과이 프로젝트에 돌입한다. 그가 24번째 도전하는 나라다. 거장의 위대한 발걸음은 과연 어디까지 이어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