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케냐 나이로비에서 열린 ‘유엔 국제플라스틱협약 성안을 위한 제3차 정부간협상위원회(INC-3 discussions)’가 성과 없이 끝났다. 지난해 9월 발표된 협약 초안을 기반으로 각국 대표와 관계자들이 500건 이상의 의견안을 제출했지만 각 나라의 입장차가 커서 어떠한 방안도 채택되지 못했던 것. 4차 회의를 위한 국가 간 협력 과제 도출에도 실패했다.
유엔은 2022년 3월 제5차 유엔환경총회에서 국제플라스틱협약 체결을 추진하기로 결의했고, 이후 총 5차례의 정부간협상위원회 회의를 통해 법적 구속력이 있는 협약을 만들기로 합의했지만 불과 1년여 만에 협상은 브레이크가 걸렸다. 지구를 살리기 위해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대의에는 동의하지만 각론으로 들어가면 국가마다 생각이 제각각이었다.
◆규제 속 난관 빠진 ‘플라스틱 강국 한국’
케냐 협상위원회의 쟁점은 플라스틱 규제를 위해 생산 자체를 법적으로 제한해야 하는지, 아니면 재활용과 재사용 등 폐기물 관리에 중점을 두어야 하는지였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당시 유럽연합(EU)과 캐나다 등 환경 선진국이 포함된 ‘플라스틱 오염 종식을 위한 우호국 연합’은 생산 감축 및 독성 화학물질의 사용 중단을 법제화하는 데에 지지를 보냈다.
사우디아라비아, 러시아, 이란 등 산유국들은 이에 반대했다. 특히 석유화학 부산물이자 플라스틱의 1차 소재인 폴리머를 규제하는 부분에 대해 이들 국가의 반대가 컸다.
이 대립 상황에서 한국은 어정쩡한 위치였다. 한국은 2022년 플라스틱 감축을 위한 국제적 흐름에 호응하기 위해 우호국 연합에 가입했지만 핵심 쟁점인 플라스틱 생산 감축에는 유보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유엔환경계획(UNEP)에 제출한 사전보고서에서 생산 감축 대신 폐기물 관리 중심의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환경보호가 아닌 플라스틱 산업의 측면에서 한국의 위상을 보면 저절로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한국이 세계적인 플라스틱 수출국이기 때문이다.
2021년 플라스틱 전주기 품목별 수출 상위국을 보면 한국은 최종 제품과 폐기물을 제외한 거의 전 분야에서 골고루 7위 이내에 포진돼 있다. 이 중 플라스틱 공업원료 및 전구체 부문에서는 세계 1위다. 2022년 기준 4억30만t에 달하는 세계 플라스틱 생산에서 한국이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셈이다.
그만큼 관련 산업도 활성화돼 있다. 화학바이오산업 인적자원개발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플라스틱 관련 업종으로 분류된 사업체는 국내 2만943개에 달한다.
이 중 96.6%에 달하는 2만236개가 50인 미만의 영세 사업장이라는 점도 짚어야 할 대목이다. 한국이 세계적인 플라스틱 수출국이긴 하지만 대대적인 국제규제 시행에 대처할 수 있는 기초체력은 없다는 의미라서다.
이미 전 세계적인 플라스틱 사용 규제 흐름 속 한국의 관련 원료와 제품의 수출량 감소는 현실화되고 있다. 한국기계산업진흥회에 따르면 지난해 1~3분기 고무 및 플라스틱제품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6.3%나 감소했으며 관련 규제가 확대될수록 수출액은 더 큰 폭으로 감소할 것으로 관측됐다.
이 와중에 글로벌플라스틱협약이 생산을 규제하는 방식으로 체결될 경우 자칫하면 수십 년간 다져온 산업 기반 체제가 무너질 수 있고, 이는 기업뿐 아니라 한국 경제에도 큰 손실이 된다. 관련 배경을 알게 되면 한국의 주저하는 이유가 쉽게 이해될 수밖에 없다.
◆거스를 수 없는 시대 흐름… 관건은 ‘적응’
일부 국가의 반발에도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겠다는 큰 틀의 시대 흐름은 거스를 수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 런던동물학회와 미국 로드아일랜드대학 연구팀은 2021년 국제 종합환경과학회지에 발표한 연구에 “기후 변화와 플라스틱 문제는 상호 밀접하게 연관 있다”면서 “플라스틱이 기후 위기를 유발하고, 기후 위기가 다시 플라스틱을 늘려 해양 환경에 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작용 중”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2023년 여름이 역대 가장 더웠다는 결과가 속속 나오는 가운데 플라스틱 사용이 이런 기후 변화의 핵심 요인 중 하나라는 인식은 점점 확산하고 있다.
결국 한국 플라스틱 산업도 시대 흐름에 맞춰 ‘적응’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다. 다행히 국내 석유 화학업계는 적응의 시작점인 기술 혁신을 이미 시작했다. 난관 돌파를 위한 핵심기술은 생분해성 플라스틱이다. 생분해성 플라스틱은 자연에서 분해가 가능한 플라스틱으로 폴리부틸렌아디프텔레프탈레이트(PBAT)와 폴리락틱산(PLA) 등이 대표적 상품이다. 정부도 생분해성 플라스틱산업의 육성을 위해 규제 선진화 등을 모색한다는 방침이다.
생분해성 플라스틱 등을 포함한 이 같은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산업 기반을 유지한 채 순환경제를 구축하는 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밖에 없다. 순환경제란 ‘물질이 폐기물이 되지 않고 자연히 재생되는 시스템’을 뜻하며, 이는 국제플라스틱협약이 달성하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이기도 하다.
산업 환경을 해치지 않으면서 순환경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회 시스템의 변화가 필수적이다. 국제환경단체인 세계자연보호기금(WWF)이 주도하는 ‘글로벌 플라스틱 조약을 위한 비즈니스 연합’이 추구하는 비전은 힌트가 된다. 이 단체는 플라스틱이 폐기물이나 공해가 되지 않고 제품과 재료의 가치가 유지되는 순환경제로 나아가기 위해 플라스틱 생산과 사용을 줄이고, 가능한 한 일회용 플라스틱을 사용하지 않는 등의 방안과 함께 재사용이 가능하고 내구성이 뛰어난 생산 솔루션으로의 전환을 해결 방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연합은 이러한 정책을 광범위하게 적용하면 2040년까지 연간 플라스틱 오염량을 현재와 같은 사업 방식보다 80% 이상 줄일 수 있고, 2060년까지는 거의 제로에 가깝게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중이다.
순환경제를 추구하는 환경단체인 ‘엘런 맥아더 재단’도 이런 변화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 단체의 글로벌플라스틱협약 관련 공동 책임자인 카스텐 바흐홀츠는 “단순히 재활용하거나 줄이는 것만으로는 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플라스틱을 설계하고 사용하는 방식을 바꿔야 한다”면서 “지금이야말로 더 강력한 정책과 신속한 비즈니스 조치가 필요한 때”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