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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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그대로 내버려둬 [詩의 뜨락]

변혜지

멸망이 낡은 담요 위에 웅크린 채 누워 있다. 나는 그 애를 두어 번 쓰다듬는다. 창문 밖에선 고함과 비명이 번갈아 들려왔어. 세계를 구하고 싶은 사람들이 속출하는데, 이상하지. 어제보다 어둡기만 해. 내가 손을 뻗을 때,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고 앉은 네가 말했다. 그거 그대로 내버려둬. 구태여 머물 필요가 없는 세계도 있다는 것을 네가 깨닫기 전에, 눈을 감겨주어야 하는데. 손을 뻗어도 닫지 않았다.

 

-시집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문학과지성사) 수록

 

●변혜지 시인 약력

 

*1991년 서울 출생. 2021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멸망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