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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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한국 드라마를 본 죄

2015년 북한 권력 2인자이자 노동당 총비서였던 최룡해(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가 수개월간 정치무대에서 사라졌다가 복귀했다. 최룡해는 첫째아들이 한국 드라마를 보다 국가안전보위부에 발각되자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이를 보고하고 혁명화 교육을 자청했다(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실장)고 한다.

한국물 영상은 1990년대 후반 고난의 행군 이후 들어선 장마당을 통해 급속히 퍼졌다. 이곳에서 한국 드라마, 영화, 가요를 담은 CD와 DVD, 나중에는 USB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북한 당국이 2009년 10월 김일성종합대학을 불시검문했는데 학생 1만8000명 중 2000여명의 책가방과 소지품에서 한국 영상이 담긴 CD와 USB가 나왔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한국 드라마, 영화를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국민의힘 태영호 의원)고 한다. 간부와 중산층 가구는 밤새 드라마를 보는 일이 허다했다. 동무나 동지 대신 ‘오빠’ ‘자기’ 등 남한식 말투와 옷차림이 유행하기도 했다.

한류열풍에 놀란 북한 당국은 특별전담조직 ‘109 연합지휘부’를 가동해 대대적인 단속에 나섰다. 관련법에는 한국 영상물을 유입·배포하면 최대 사형에 처하고 시청하면 최대 15년의 징역(노동교화형)에 처하도록 명시했다. 북한인권보고서에 따르면 2020년 양강도에서 ‘사랑의 불시착’ 등 한국 드라마가 대량으로 담긴 USB를 유포한 남성이 공개 총살됐다. 다음 해 6월에는 평안남도 평성시 경기장에서 20대 4명이 SBS 드라마 ‘펜트하우스’를 시청하다 붙잡혔는데 10∼12년의 징역을 받았다. 길거리에서 이 드라마 대사를 따라 하다 적발된 20대 청년들도 모진 고문과 처벌을 당했다. 비슷한 시기에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USB로 밀반입한 주민이 총살되고 시청한 학생들은 무기징역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영국 BBC는 그제 북한에서 한국 드라마를 봤다는 이유로 10대 2명을 12년 징역에 처하는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에는 16세 소년이 수갑을 차고 학생 수백명 앞에 서 있는 모습이 담겼다. 주민이 드라마를 보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김정은 정권의 참혹한 인권유린에 경악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주춘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