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성당을 다녔으면 좋겠어.”
임신 사실을 알고 아내가 한 말이었다. 내게 신앙은 역사나 철학이지만 아내에게는 신념이었다. 아내는 자신이 느껴 온 믿음을 아이도 느끼며 살기를 원했다. 아이가 태어난 뒤 아내는 신앙생활을 위해, 그리고 난 건축물을 보기 위해 주말마다 다른 성당을 찾아다녔다. 가끔 방문했던 성지(聖地)에서는 천주교와 조선 후기 역사를 아이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성지에 갈 때마다 아이는 불편해했다. 성지에 조성된 박물관에 당시 신도들이 겪었던 고문과 핍박의 장면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피 흘리고 뒤틀린 육체를 재현하는 방식 말고 그 시대를 이해하는 방법은 없을까? 무엇보다 그 전시물은 목숨까지 내놓으며 지키고 싶었던 그들의 신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다 찾은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다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천주교 순교자들의 절대적인 믿음이나 이를 실현한 초월적 의지 같은 비범함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대다수의 종교가 추구하는 보편, 즉 종교를 통한 ‘위안’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천주교인들이 겪은 고난의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전시물이 아닌 일반인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빛’, ‘공간’, ‘산책’이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감동을 받는 장소는 ‘위안’, ‘위로’라는 뜻의 ‘콘솔레이션 홀(Consolation hall)’이다. 14m 깊이의 땅속에 배치된 콘솔레이션 홀은 2m가량 들린 상자로 둘러싸여 있다. 상자 안으로 들어서면 공간을 둘러싼 빛이 공연을 시작한다. 영상은 약현성당과 명동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박해의 시대였던 조선 후기 사회,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전도’를 다루고 있다. 모두 천주교와 관련된 소재이지만 그 관계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콘솔레이션 홀 가운데에는 빛의 우물이 박해 때 순교한 다섯 성인의 유해가 있는 곳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은 안내자처럼 콘솔레이션 홀과 마주하고 있는 ‘하늘광장’으로 이어진다. “자네의 시작은 보잘것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욥기 8장 7절)”라는 성경 구절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다. 동시에 성인들의 순교가 현재 한국 천주교의 형성과 지금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스토리라인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빛의 극적인 연출을 바라보는 방문객들은 이 세상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살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누군가가 반드시 절대자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먼저 떠난 부모님, 친구, 반려동물이라면 빛이 주는 위로와 위안이 더 와 닿을 것이다.
빛의 안내를 따라 ‘하늘광장’으로 나가면 붉은 벽돌로 된 공간이 방문객을 맞는다. 삶의 주인인 각자를 상징하는 ‘영웅’과 이 땅에서 순교한 이들 중 성인의 반열에 오른 44인을 상징하는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건 ‘하늘 아래 빈 공간’이다.
이 땅은 천주교인들의 순교 성지이기 전에 형장이었다. 조선 정부는 동대문 밖에서 사형을 금했던 ‘서경(書經)’의 내용을 따르고 형벌의 집행을 통해 정부의 메시지를 확산하기 위해 도성 서쪽에 있는 저잣거리에 형장을 마련했다. 천주교 신자들을 포함해 형장에서 처형된 이들의 마지막 순간에는 비록 이곳이 북적이는 저잣거리라 하더라도 침묵만 가득 찬 진공의 공간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사람은 원망의 눈빛이나 동경의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늘만 보이는 빈 장소에서 성지라는 역사를 포함한 땅의 이야기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 본다.
숨소리마저 울리는 하늘광장은 하나의 재료로 만들어진 단순한 육면체 공간이다. 그래서 내면세계에 더 집중하게 된다. 더불어 어떤 방향으로도 천천히 걸을 수 있어서 모든 감각이 더 빠르게 안으로 침잠하게 된다. 걷기를 통한 사색은 하늘광장과 콘솔레이션 홀을 비롯해 ‘순례의 길’로 연결된 박물관 곳곳으로 확장된다. 순례는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보행’보다 휴식이나 명상을 목적으로 하는 ‘산책’에 가깝다. 그래서 움직임의 속도는 느리고 정처는 없으며 걷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발견을 중시한다.
산책은 박물관이 들어선 서소문역사공원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행위다. 1905년 개통된 경의선은 이 땅을 도심과 갈라놨는데, 그럼으로써 이곳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후 서소문 고가도로가 개통(1966년)되면서 땅의 역사는 잊혀져 갔고, 그런 상태에서 설치된 지하주차장과 재활용 쓰레기처리장은 공원을 사람들의 관심 밖의 장소로 만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경의선이 지하화되어 접근성이 좋아지고 남쪽을 지나는 칠패로 건너편에 서울역 북부역세권 개발이 완료되면 서소문역사공원은 반경 500m 내 유일한 근린공원이 된다. 당연히 시민들은 그간 이곳에서 그렇게 필요로 하지 않았던 공원으로서의 역할, 즉 여가와 휴식을 위한 산책의 공간을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서소문 밖 네거리의 역사와 천주교 성지로서의 역사를 구분할 수 없듯이 서소문근린공원을 리모델링해서 조성한 서소문역사공원도 공원이라는 도시 속 공공공간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박물관을 운영하는 천주교에게 요구되는 건 이 공간을 천주교라는 특수에 한정하지 않고 보편으로 넓히려는 노력이다.
순례의 길을 따라 서성이다 하늘광장 구석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순간 4대 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이 기꺼이 순교를 택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함께 모여 살았던 교우촌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조선의 땅에서 하늘의 주인(天主)을 함께 외칠 수 있었던 공동체였다. 죽음과 배교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 함께한 공동체를 배신하는 행위였던 배교는 그들에게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죽어서도 공동체 안에 머물고 싶었다. 당시 천주교인들에게 절대자에 대한 믿음보다 중요했던 건 함께한 이들과의 결속이었다.
신앙을 통한 공동체 안에서의 결속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다. 가톨릭은 그 공동체의 범위를 보편화함으로써 세계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어로 가톨릭을 의미하는 ‘카톨리코스(καθολικος)’는 ‘보편적인’, ‘일반적인’을 뜻하기도 한다. 서소문역사공원과 성지역사박물관이 넓혀야 할 지평도 결국은 천주교인에서 확장된 대중과 공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