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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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K상무의 EU CBAM 악전고투

밀려드는 환경 규제, 국내 수출 中企 대응 고심

“독일 고객사가 ‘이럴 거면 더 비싸도 탄소배출량 기준을 맞춘 유럽산 제품을 쓰는 게 낫겠다’고 한다. 진짜 무역장벽이다.”

국내 중소 철강 원재료 제조사의 K 상무는 유럽연합(EU)이 탄소배출량 감축을 목표로 시행 중인 탄소국경조정제(CBAM)와 관련해 7일 이렇게 하소연했다. CBAM은 EU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평균 탄소배출량을 1990년의 55% 수준으로 감축하려고 하는 법이다. EU 안에서 유통되는 철강, 알루미늄, 수소, 시멘트, 전기, 비료 등 6개 품목의 생산 단계에서 발생한 탄소배출량을 확인, 기준을 넘는 경우 탄소세 등 추가부담을 지우겠다는 것이다. 탄소배출량이 많은 제품을 퇴출하겠다는 얘기다.

정재영 산업부 차장

유럽 수출량이 많은 철강업계는 지난해 4분기 수출품목에 대한 탄소배출량부터 분기마다 EU에 보고해야 했고, 지난달 말 첫 의무 보고를 마쳤다. 신고자는 분기 종료 1개월 안에 제품 총수량, 탄소배출량, 지불한 탄소 가격 등이 포함된 보고서를 내야 한다. 이를 어기면 수출 물량 이산화탄소환산량(tCO₂e)당 10~50유로의 벌금이 부과된다.

유례없는 제도라서인지 EU에서도 ‘보고서 등록 지연’ 등 시행에 엇박자가 있었다. 내년 말까지 ‘전환 기간’으로 설정하고 수입 보고서 의무만 부여한 이유일 것이다. 그때까지는 EU 기준에 맞는 보고서 제출 대신 인증서를 구매하거나 자국의 배출량 기준을 따를 수 있도록 했다.

아직 시간 여유가 있는 것 같지만 K 상무는 EU 기준을 맞추기 위해 동분서주다. 철강 수출업만 25년인 그는 “유예기간에 넋 놓고 지내다간 기회를 놓칠 수 있다”고 했다. 정상적인 절차를 따르기로 한 K 상무에겐 가시밭길이 펼쳐졌다.

EU는 제품별 탄소배출량 보고서 작성에 있어서 올해 2분기까진 기준값 적용을 허용했다. 10월에 작성할 3분기(7∼9월) 보고서부터는 탄소배출량을 직접 측정해야 한다. 언뜻 시간 여유가 있는 것 같지만 제품이 EU에 도달한 시점 기준이라서 K 상무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한 달여뿐이다. 그는 “제품 제조에 30∼50일, 배를 통한 운송에 두 달쯤 걸린다”며 “3월 중순부턴 제품 생산 시 탄소배출량을 측정해야 하는데 막막하다”고 했다.

EU가 CBAM을 꺼내 들자 국내에선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대응 격차 얘기가 나왔다. 대기업들은 2022년부터 전담 테스크포스(TF) 등을 꾸려 적극 대응해 첫 보고 때 EU 요구대로 탄소배출량을 측정해 냈다. 돈·인력·시간이 부족한 중소기업을 위해 대기업은 물론 정부도 발 벗고 나섰다. 하지만 실무 차원의 도움은 부족하다.

첫 보고를 잘 끝낸 대기업들은 TF를 해체하고 담당자를 한두 명만 둔 평시체제로 전환해 일부 중소기업의 간절한 요청에 제대로 응대하지 못하고, 정부가 꾸린 원스톱 지원센터 등에선 “최근 배포한 가이드라인을 참고하라”고만 조언했다.

중소기업들은 배출량을 측정할 기기는 어떤 것이고 어디서 구매하는지, 이를 검증할 제3기관은 어디이고 비용은 얼마인지 등 마지막 퍼즐이 필요하다. 지난해 초부터 CBAM 대응에 시간을 쪼개 쓰는 K 상무는 “정부와 대기업이 도움 준 것만으로 감사하다”면서도 “저보다 모르는 경쟁사 후배들과 알음알음 준비하는 게 힘겹다”고 했다.

국내 수출 중소기업에는 악전고투하는 K 상무들이 많다. EU CBAM을 시작으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공시 의무, 미국판 탄소국경세로 불리는 청정경쟁법(CCA) 등 환경을 기치로 밀려드는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그들이 중심을 잃지 않을 실무적 도움이 절실하다.


정재영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