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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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월의쉼표] 해주고 싶었던 말

학생 한 명이 찾아왔다. 뜻밖의 만남이었다. 작년에 내 수업을 들었던 학생이기는 하지만 종강 후로는 만난 적도 없고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에 졸업한다고 했다. 그 시기의 학생들이 으레 그렇듯 그 역시 진로에 대한 고민으로 심란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 일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아는데 공모전에서 번번이 낙선한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혔다. 저의 재능은 딱 거기까지인가 봐요. 직업으로 삼을 만큼은 못 되고 취미로 삼기에는 좀 아까운 어중간한 정도요.

그래서 오래 고민하다가 지난주부터 꼭 필요한 조언을 해줄 것 같은 몇몇 선생님들을 찾아뵙는 중이라고 학생은 말했다. 그런 훌륭한 선생님 중 하나로 나를 떠올려준 것은 영광이지만 사실 엄청난 착각이고 오류였다. 조언이라니. 제 앞가림도 못 하는데. 그래도 나를 선생이요 어른이라고 찾아온 학생을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는데 어쩐다? 공모전 결과에 연연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하면 곧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같은 모범답안이라도 들려주어야 할까.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하여 나는 말없이 학생의 하소연을 듣기만 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온 것은 그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을 때였다. 신혼집 집들이 초대 전화였다. 짧은 통화가 끝나자 학생이 물었다. 선생님 친구신데 신혼이면 되게 늦게 결혼하신 거 아닌가요? 맞아요. 남자 동기 중 제일 늦게 했어요. 그렇게 어쩌다 보니 화제가 뜬금없이 친구 이야기로 흘렀다. 그러니까 친구가 결혼정보회사를 통해 결혼했다는 것, 사연인즉 결혼정보회사의 끈질긴 러브콜을 계속 거절하다가 해외 유학을 떠나면서 5년 후 귀국하니 이제 전화하지 말라고 통보했다는 것, 그리고 5년 후 귀국한 바로 다음 날 다시 전화를 받았다는 것, 유학 잘 다녀오셨냐는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 정도 끈기와 열정과 집요함이라면 믿어도 되겠다는 생각에 곧장 회원가입을 했다는 것, 그렇게 운명적으로 아내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다 말고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싶어 고개를 들었다. 학생이 상기된 얼굴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생님이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해주고 싶으셨던 건지 알겠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아닌데. 그런 말을 해주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김미월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