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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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진의대도서관] 어두운 현실보다 더 어두운 원인

영화·게임산업 등 발달로 폭력에 ‘감염’
K드라마 성공에 내포된 韓 특유의 폭력성

인간은 폭력적으로 설계되지 않았다. 그러나 폭력에 이용되기는 쉽다. 2차 세계대전 동안 근접 전투에서 싸우는 소총수 중 실제로 총기를 발포했던 미국 병사는 15∼20%에 불과했다. 이 숫자는 인간에게 살인을 망설이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 준다. 이 망설임은 같은 종이 서로를 죽이지 않게 해 주는 안전장치다. 그러나 전투에서 이런 안전장치는 장애물에 불과하므로 1950년대 이후 병사들은 ‘조작적 조건형성’이라는 심리 기제를 통해 이 안전장치를 극복하는 법을 학습했다.

가령 1950년대 이후 표적이 인간 모양으로 바뀌었다. 병사들은 인간 형상의 표적이 튀어나오면 쏜다. 총을 맞은 표적은 쓰러지고 특정 숫자의 표적을 쏘면 보상이 주어진다. 이런 방식의 자극과 반응을 특정 행동이 자동화할 때까지 반복한 결과 2차 세계대전 당시 15%에 불과했던 총기 발사 비율이 한국전쟁에서 55%, 베트남 전쟁 이후 95%까지 상승했다.

폭력적인 이야기조차 폭력 자체를 미화하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폭력을 이용한다. ‘오징어 게임’ 이후 ‘더 글로리’, ‘마스크걸’ 등 K드라마의 세계적 흥행이 이어지고 있다. 지옥에 가기 전 타인의 삶을 경험하는 인생 환승물 ‘이재, 곧 죽습니다’, 연쇄살인마를 태운 택시 운전사의 주행을 다룬 공포물 ‘운수 오진 날’은 참신한 소재로 지난해 호평받았다. ‘소년시대’는 청춘 액션 코미디 학원물로, ‘살인자 난감’은 연쇄살인물과 히어로물이 결합된 독특한 범죄물로 최근 주목을 끌었다.

이 화제작들의 공통점은 폭력이다. 비참하고 잔혹한 생존 게임, 맹목적이고 가혹한 복수혈전, 잔인하고 자극적인 범행 묘사. 규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 생태계에서 K드라마가 전례 없는 호응을 얻는 건 K드라마가 폭력을 노골적으로 다루는 데 ‘탁월’해서다. 구타와 살인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 수위는 한국인들이 타인과 사회를 향해 품고 있는 분노와 적개심의 수위에 비례한다. K드라마 특유의 성공에는 한국 사회 특유의 폭력성이 있다.

23년의 군 경력을 지닌 심리학자 데이브 그로스먼과 학교 안전 분야의 전문가 크리스틴 폴슨이 2016년 출간한 ‘살인 세대’는 미국 군대의 총기 발사 비율을 95%까지 끌어올렸던 전략을 게임 업계가 아이들에게 적용하고 있으며, 이는 1975년 이전에는 전무했던 청소년 대량 살상 범죄가 증가한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1970년대는 가정마다 텔레비전이 보급됐던 시기다. 영화, 비디오게임, 인터넷게임과 함께 아이들은 능동적으로 폭력적 행위에 참여하게 됐고 그 결과 역사상 가장 잔인한 세대가 길러졌다는 것이다. 인간의 죽음과 고통을 보며 쾌락을 느끼도록 조건 형성된 아이들은 폭력의 씨앗을 품은 채 자란다.

폭력적인 드라마의 상당수가 웹툰 원작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웹툰의 주된 소비층인 10대와 20대에게 폭력은 잘 팔리는 상품이다. 책이 출간된 지 8년이 지난 지금 미디어는 더 적극적으로 폭력의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있고 한국은 대표적인 감염국이다. 세계 최저 수준의 저출산, 정치적 혐오와 테러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한국인의 스트레스가 원인일 수 있다. 타인을 증오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안도감 역시 그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전쟁터에서도 작동하던 그 인간성의 안전장치를 회복하는 일이 시급하다. 폭력을 처벌하는 법보다 먼저, 폭력 앞에서 망설이게 되는 영혼이 사회를 유지하고 구원하기 때문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