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10일(현지시간)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열린 대선 후보 경선 유세에서 방위비를 부담하지 않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회원국을 공격하도록 러시아를 격려하겠다는 자신의 발언을 소개했다. “미국의 이익을 가장 우선 순위에 놓는 외교정책으로 돌아가겠다”는 트럼프표 외교의 위험이 현실화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집권한다면 방위비 분담 재조정, 주한미군 재배치 등 한·미 동맹의 본질적 문제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유세에서 재임 당시 나토 회의 대화를 거론했다. “한 큰 나라의 대통령 중 한 명이 일어나서 ‘만약 우리가 돈을 내지 않고 러시아의 공격을 받으면 당신은 우리를 보호해 주겠느냐’고 하자 나는 ‘당신은 돈 내지 않았으니 채무불이행이 아니냐’고 했다”는 얘기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 따르면 그는 당시 “난 당신을 보호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나는 그들(러시아)이 원하는 것을 내키는 대로 모조리 하라고 격려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그동안 동맹의 안보 무임승차론을 주장하며 나토 회원국에 방위비 증액을 압박해왔으나 이날 발언은 가장 극단적으로 평가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 1기에서 보여준 미국 우선주의 대외정책을 지속·강화할 것임을 시사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집권 당시 나토 동맹국 중 20개국이 국내총생산(GDP) 대비 2%를 국방비로 지출하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자 이를 채무로 규정하고 해당 국가에 빚을 갚으라는 식의 압박을 가했다. 앙겔라 메르켈 당시 독일 총리에게는 자체 방위비를 늘리지 않으면 독일에 주둔한 미군을 철수할 수 있다고 위협했고, 나토 회원국의 방위비 분담률이 미국보다 낮다며 나토 탈퇴를 공개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1일 성명에서 “트럼프는 자신이 다시 집권하고 러시아가 우리 나토 동맹들을 공격하면 동맹들을 버리고 러시아가 ‘원하는 것을 내키는 대로 모조리 하도록’ 두겠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다”면서 “끔찍하고 위험하다”고 비판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도 성명에서 “동맹이 서로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암시는 미국을 포함해 우리 모두의 안보를 훼손하고 미국과 유럽의 군인을 위험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미국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 “역사는 (이런 상황이) 전쟁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유발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1950년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한국을 제외한 (극동) ‘방위선’(애치슨 라인)을 발표한 지 5개월 뒤 북한이 (남한을) 침략했다”고 지적했다.
이날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발언은 이번 대선 공약 웹사이트인 어젠다 47에 올린 ‘고갈되고 있는 미국 군대의 재건’이라는 제목의 4분 34초 영상에서 “우리(미국)는 우크라이나에 거의 2000억달러(267조원)를 썼고 유럽은 아주 일부만을 부담했다”고 비판한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번 경선 과정에서는 주한미군 문제나 한국의 방위비 분담 문제를 직접 언급한 적은 없다. 어젠다 47에서도 우크라이나 문제를 주로 다뤘다. 하지만 트럼프 1기에서 한국 정부가 겪었던 여러 어려움을 상기할 때 트럼프 전 대통령이 돌아오면 한·미 동맹은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는 우려가 꾸준히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 시기 강화된 한·미 동맹과 한·미·일 삼각협력의 장치들이 유지될 수 있을 것인지, 주한미군 재배치와 방위비 분담금 재협상 요구는 어떤 형태로 진행될 것인지 등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다.
문제는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 시를 대비해 철저히 준비하려고 해도 1기와 마찬가지로 2기도 오리무중이라는 점이다. 외교가에서는 ‘트럼프 인물’로 꼽히는 이들이 실제 트럼프 2기에서 일하게 될지에 반신반의하는 목소리가 높다. 현재 헤리티지재단 등 공화당계 싱크탱크들이 내놓는 정책 공약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채택할지에도 회의적인 견해가 많다.
그럼에도 현재로는 트럼프 1기를 통해 얻은 교훈을 반추하고, 기존 공화당 정책집단을 통해 분석하고 준비하는 방법뿐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한다면 2기 집권인 만큼 잠재적 권력이 제한된다는 점에서 1기보다는 공화당이나 싱크탱크 등 기존 정책집단들의 관여도가 높아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동맹문제, 북한문제, 통상문제로 나눠 ‘트럼프 리스크’와 그 해법을 짚었다. 첫 번째는 동맹문제다.
◆한·미·일 공조 지속될까
첫째는 트럼프 대통령이 한·미 동맹과 한·미·일 3각 협력 등 바이든 대통령 때 강화된 동맹 정책을 계승하느냐다. 지난해 4월 워싱턴선언으로 만들어진 핵협의그룹(NCG) 등 강화된 한·미 확장억제 장치들이 계속되느냐도 관심사다.
정구연 강원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2일 통화에서 “동맹의 제도화에 부정적인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바이든 행정부 시절 만들어진) 한·미·일 3자 협력 등 제도화된 동맹에 힘을 싣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쉴라 스미스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도 “트럼프 전 대통령은 한·미·일 3자 협력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며 바이든 행정부에서 강화된 한·미·일 3각 협력에 변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다소 낙관적인 견해도 나온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이날 통화에서 “트럼프 행정부에서 강화된 확장억제를 굳이 되돌리거나, 한·미·일 3각 협력을 약화시켜서 얻을 이익은 없다”며 “오히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트럼프 행정부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려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름은 바뀔 수 있지만, 트럼프 행정부와 바이든 행정부를 관통하는 미국 외교정책의 최우선 목표인 중국 견제를 위해서라도 인태지역에서 한·미 동맹, 한·미·일 협력의 강화는 계속될 것이라는 얘기다.
양욱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미·일 안보협력을 트럼프 행정부 때 조금 더 발전시켜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성과로 만들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된다면 한·미 동맹 강화와 한·미·일 안보협력에 바이든표 정책이라는 색채를 희석해 우리 정부 차원에서 이를 지속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한·미·일 공조에서 ‘트럼프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한·일 관계의 지속·안정성이 중요하다는 조언도 나온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이날 통화에서 “한·일 관계 개선이 한·미·일 공조가 됐건, 트럼프 전 대통령의 방위비 분담 재조정 요구가 됐건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방위비 분담 재조정 요구 어떻게?
트럼프 행정부 시기 장기 협상 교착을 거쳐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선 2021년 체결된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은 2025년 말까지 적용되며, 2026년부터 새 협정이 적용된다. 방위비 분담 재조정은 트럼프 행정부 1기 내내 한·미 정부 간 접점을 찾을 수 없었던 문제인 만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돌아온다면 이와 관련한 혼란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SMA 협상 자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SMA의 틀 자체를 트럼프 전 대통령이 흔들려 할 수 있다는 우려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우리 측 분담금의 5배에 이르는 50억 달러(약 6조7000억원) 규모의 분담금을 요구한 바 있고, 이 수준을 맞추기 위해 현행 SMA의 틀을 넘어서 전략자산 전개 비용이나 연합훈련 비용까지 새로운 분담 항목으로 포함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됐다. 주한미군 배치 조정 관련 논의가 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다만 동맹 분담 조정 문제에서 현재 트럼프 전 대통령의 우선순위는 한반도보다는 우크라이나, 나토 등에 집중돼 있는 만큼 이들에 대한 대응을 보면서 다른 미국의 동맹국과 보폭을 맞춰 준비해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양욱 연구위원은 “한반도와 관련된 문제는 최소 (새 행정부가 들어선 지) 1년 뒤에야 본격적으로 나올 것”이라면서도 “트럼프 전 대통령 혼자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하는 미국인들이 많으니 우리 스스로 설득할 전략이 필요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 내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주장이 지지를 받는 이유가 있는 만큼 우리로서도 새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얘기다. 양 연구위원은 “예를 들어 미국이 자국의 방위산업 능력을 키우려 하는 만큼 한·일이 공급망에 참여해 역할을 하고, 미국의 생산 역량 강화에 도움을 주는 방식 등으로 조화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