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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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883일 만의 간첩단 1심 유죄, 재판 지연 막을 방도 절실

북한 지령에 따라 간첩 활동을 한 혐의를 받는 이른바 ‘청주간첩단’ 일당 3명이 엊그제 청주지법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2021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후 유죄 판결이 나기까지 883일이나 걸렸다. 늦어도 한참 늦은 판결이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라고 하지 않는가.

피고인들은 2017년 북한 공작원이 시키는 대로 이적단체 ‘자주통일 충북동지회’를 결성하고 미화 2만달러(2600여만원) 상당의 공작금을 받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4년간 충북 일대에서 암약하며 국가 기밀 탐지, 국내 정세 수집, 지역 인사 60여명 포섭 시도 등의 북 지령을 수행한 혐의도 있다. 재판부는 “북한은 반국가 단체가 명백하다”며 “피고인들의 범행은 대한민국의 안정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존립을 침해할 수 있다”고 준엄히 꾸짖었다. 지극히 상식적인 결론으로, 창원, 제주 등의 간첩단 사건 재판에도 그대로 적용될 것으로 본다.

간첩단 사건에서 유독 심리가 지연된 사실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피고인들은 법원 정기 인사로 담당 판사가 바뀔 때마다 법관 기피신청 제도를 악용했다. 1심 재판에서 기피신청을 낸 것만 5건이다. 기피신청 사건은 다른 재판부에 배당돼 심리한다. 대법원에 가면 원래 사건 재판은 중단되고 판단은 무작정 미뤄진다. 충북동지회 피고인들 재판은 무려 11개월간 멈춰 섰다. 선고가 다가오자 유엔에 제3국 망명 지원을 호소하는 꼼수까지 부렸다. 이쯤 되면 피고인의 정당한 방어권 행사라고 보기 어렵다.

선고가 미뤄지면서 구속기간 만료나 보석으로 피고인 3명이 모두 풀려났다. 지난 1월 경찰로 대공 수사권이 넘어가면서 그렇잖아도 간첩 수사가 줄어들까 걱정인 판에 재판까지 마냥 더뎌지면 간첩이 활개치고 다니지 않을지 걱정이다. 형사소송법은 ‘기피신청이 소송 지연을 목적으로 함이 명백한 때에는 이를 기각한다’는 취지의 규정을 두고 있다. 적어도 국가안보 관련 사건에서는 판사들이 이 조항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엊그제 가진 취임 후 첫 기자간담회에서 “재판 지연 문제가 심각하다”며 “법관 증원이 사법부 최우선 과제”라고 밝혔다. 법관 정원은 2015년부터 9년째 3214명으로 묶여 있다. 정원을 3584명으로 늘리는 판사정원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감감무소식이다. 재판 지연을 막기 위한 방안 마련에 법원뿐 아니라 국회도 머리를 맞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