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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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의우리건축톺아보기] 원래의 것과 눈에 익은 것

피라미드 화강암 덮개 복원
우리 눈에 낯설어 논란 증폭
세월의 흔적 맞은 모습 유지
옛 폐허의 미학 느끼게 해야

이집트 피라미드 복원이 요즘 국제적으로 논란의 중심에 서 있다. 이집트 수도 카이로 인근 가자지역의 멘카우레 피라미드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작업이 한창인데, 이 모습이 언론에 공개되자 많은 사람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피라미드는 오랜 세월을 거쳐 풍화된 석회암이지만, 원래는 피라미드 하단 3분의 1까지 다듬은 화강암으로 덮여 있었다. 아마도 풍화에 약한 석회암을 보호할 목적으로 풍화에 강한 화강암 덮개를 설치하여 피라미드의 밑단을 보호했던 듯하다. 가자지역의 피라미드가 기원전 2650년에서 2150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니 50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피라미드의 덮개 역할을 하던 화강암이 모두 떨어져 나가 그 속에 있던 석회암 벽면이 노출되었고 원래의 피라미드인 양 그 모습이 우리의 눈에 익었다. 이집트 정부가 피라미드를 화강암으로 덮어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모습을 공개하자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보지 못한 매끈한 화강암 피라미드의 모습에 경악하면서 “이건 아니야!”라고 외치고 있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문화유산에서 이와 유사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사람들은 원래의 모습보다는 눈에 익은 것을 진짜라고 여기고, 오히려 역사상 원래의 것에는 낯설어하며 거부감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지금 우리가 보는 흰 대리석이나 석회석 ‘생얼’ 그리스 신전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신전은 신을 모시고 제례를 지내는 신성 공간이기에 벌거벗은 듯한 모습으로 신전을 그냥 두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혼식을 앞둔 신부가 화장하듯 신전의 기둥은 하얗게 색칠하고 기둥 위부터 지붕까지는 하양, 파랑, 빨강, 검정으로 장식했다. 이는 부처님을 모시는 사찰을 화려하게 단청하고 하느님을 경배하는 성당을 온갖 장식과 색칠로 화려하게 꾸미는 것과 같은 이치다.

또 우리는 그리스 조각상이라고 하면 인체를 절묘한 비례로 빚은 하얀 대리석 조각상을 떠올리지만, 우리가 보아온 대부분의 그리스 조각상은 로마시대 복제품이다. 원래 그리스인들은 조각상을 청동으로 만들면서 눈은 색깔 있는 돌을 끼우고 머리카락과 입술은 도금으로 색을 입혀 지극히 사실적인 모습을 구현했다. 로마시대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청동을 탐내 그리스 조각상을 녹이고 대신 대리석으로 복제품을 만들어 정원을 장식하는 것이 유행했다. 우리 눈에 익숙한 그리스 조각상은 이렇게 탄생했다.

우리나라 사례를 살펴보자. 강진에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다. ‘다산초당’은 말 그대로 다산의 초당이니 원래 초가였다. 다산 정약용이 1801년 신유사옥으로 강진으로 유배된 후 1808년부터 귀양이 해제되었던 1818년까지 이 공간에서 생활하며 제자를 길러내고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책을 저술했다. 그런데 지금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은 ‘초당’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기와를 얹은 ‘와당’이다. 그 유래를 살펴보면, 1958년 지역민이 중심이 된 ‘다산유적보존회’가 사라진 옛 다산초당을 복원한다며 초가집 대신 기와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이 집이 지어진 지 이미 65년을 훌쩍 넘어 어느 정도 고졸한 분위기를 가지게 되어 일반 대중에게는 이 집이 진짜 다산초당인 양 눈에 익었다. 그러나 다산과 교류했던 초의선사가 1812년 그린 다산도(茶山圖)에서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원래의 다산초당을 발견할 수 있다. 당연히 원래의 다산초당은 초가였고 모양은 물론 주변 풍경도 지금과는 달랐다.

1958년 다산초당을 복원할 때 왜 기와집으로 복원했을까? 이왕 복원할 바에야 원래의 모습으로 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에는 초의선사의 다산도를 몰랐을 수 있다. 아니면 새로 짓는 다산초당은 어차피 원래의 것과 같을 수 없으니 아예 다산의 업적을 기리는 사당 개념으로 초가집보다는 격을 높여 기와집으로 지었을 수도 있다.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으니 짐작만 할 따름이다.

피라미드 복원과 비슷한 사례로 우리나라에서는 산성의 복원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아 전국의 많은 산에는 삼국시대부터 쌓아온 산성이 남아 있다. 대부분 돌로 쌓은 산성은 세월이 흐르며 무너져 내려 약간의 흔적만 남아 있다. 요즘 지방자치단체들은 경쟁적으로 산성을 복원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볼거리를 만들어 관광자원으로 활용한다는 명분이다. 옛날에는 그 산에서 나는 돌을 캐내 성을 쌓았다. 다른 지역에서 돌을 운반해 쓰기에는 인력에 의존했던 당시의 사정에 돌이 너무 무거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산성을 다시 쌓기 위해 석재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석공장에서 필요한 석재를 조달한다. 이렇게 다른 곳에서 가져온 새 돌로 깔끔하게 쌓은 요즘 산성에서 옛 모습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차라리 무너져 내린 그 상태를 잘 보존하고 현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옛 분위기를 해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 복원과 달리 우리의 산성 복원이 조용히 진행되는 것은 일반인의 눈에 띄지 않아 논쟁의 무대에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피라미드 복원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신전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기 위해 알록달록하게 색칠하고 기와집 다산초당을 헐고 다산도대로 초가로 다산초당을 다시 지어도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비록 원래의 모습 혹은 지금보다 원래와 더 가까운 모습이라도 새로 복원한 것은 우리 눈에 낯설기 때문이다. 또한 오래된 모든 것에는 세월의 흔적에서 묻어나는 폐허의 미학이 작동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