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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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준칼럼] ‘건국전쟁’ 이승만을 다시 본다

‘백년전쟁’과 이승만 평가 정반대
농지개혁·여성참정권 긍정 평가도
역사 굴곡 있듯 인물도 功過 갈려
다양한 관점의 논의 출발선 삼아야

미국 수도 워싱턴에서 남서쪽으로 300㎞가량 떨어진 렉싱턴이라는 소도시가 있다. 인구 1만명이 채 되지 않지만 버지니아 군사학교(VMI) 소재지로 유명하다. 미국 최초의 주립 군사대학으로, ‘남부의 웨스트포인트(미국육군사관학교)’라고 불린다. 남북전쟁 당시 남부군 장교를 다수 배출한 곳이다.

10여년 전 워싱턴특파원 시절 VMI를 세 차례 찾은 적이 있다. 워싱턴에서 차를 몰아 애팔래치아산맥을 따라 3시간 넘게 가는 거리다. VMI의 마셜 도서관에 소장된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 유품에서 국내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서다. 밴플리트 장군은 6·25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맡고 우리 육군사관학교 설립에도 기여해 ‘한국군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박희준 수석논설위원

“‘환자’를 고국으로 모실 수 있도록 호소합니다…. 절망적인 상황입니다”(1962년 2월5일 프란체스카 여사의 편지). 밴플리트 장군이 남긴 기록물 100여 상자를 뒤진 끝에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편지 12통을 찾아 2014년 4월 국내 언론 최초로 보도했다. ‘환자’는 이 대통령이다. 편지에는 1960년 4·19혁명 이후 하와이로 망명한 이 대통령이 고국을 그리워하며 생을 마감하기까지 곤궁함이 담겨 있다. 그는 1965년 7월19일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숨을 거둔 뒤에야 고국 땅에 묻힐 수 있었다.

편지 내용을 보도한 포털사이트 기사에만 2500개에 가까운 댓글이 달렸다. 비난성 내용이 대부분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만 급급했고 친일파 청산을 제대로 못 한 천추의 한을 남긴 독재자, ‘하와이 깡패’를 미화했다는 등의 댓글이었다. 상해 임시정부가 보내주는 독립자금으로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다가 광복 후 김구 선생을 밀어내고 대통령을 꿰찼다거나 6·25전쟁 때 한강 다리를 끊고 먼저 피란 간 ‘런승만’ 아니냐는 내용도 있었다. 2012년 제작된 좌파 성향의 다큐멘터리 영화 ‘백년전쟁’의 영향을 받은 듯했다. 극성 독자는 이메일까지 보내 악담을 퍼부었다.

지난 1일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이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다. 이 대통령과 건국 1세대를 재조명한 영화다. 손익분기점이라는 관객 20만명을 일찌감치 넘어섰고 지난 주말 70만명 기록까지 깼다. 보수 단체와 인사들이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지원하고 관람을 독려한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대박’ 실적이다.

‘1960년 4월19일, 그날부터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이승만의 모든 기록들은 비난과 왜곡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영화는 85세의 이 대통령이 4선에 도전한 배경부터 살펴본다. 선거 한 달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민주당 조병옥 후보의 사망으로 대통령은 이미 정해졌고, 3·15부정선거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려는 측근들의 권력욕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분석한다. 단독정부 수립이나 친일파 청산 등과 관련해 반박 논거를 제시하고 이 대통령의 농지개혁과 여성참정권 부여, 민주주의 의지 등의 긍정적인 면모도 소개한다.

역사에는 굴곡이 있고 역사적 인물에는 공과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대통령 재임 중 제주4·3사건이나 4·19혁명 등 과정에서 민간인이 억울하게 희생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 ‘건국전쟁’이 소개하듯 민주주의 대한민국 건국의 공을 가릴 수는 없다. 공산주의가 아닌 민주주의로 국가의 길을 잡고, 토지자본이 아닌 산업자본이 경제의 주역이 되도록 한 업적은 결코 간과해선 안 된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이 풍요로움의 바탕이 되지 않았는가. 아무리 역사 해석은 후세의 몫이라지만 이 대통령을 악마로만 묘사하는 건 자학이다.

지난달 초 한국사회및성격심리학회는 올해 우리 사회가 주목해야 할 사회심리 현상으로 확증편향을 꼽았다. 자기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려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경향이다. 우리 사회가 역대 대통령을 제대로 보려고 했었는지 의문이다. 영화 ‘건국전쟁’이 역사적 인물을 놓고 다양한 관점에서 논의하는 출발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지난 주말 영화를 보고 나올 때 “젊은이들이 많이 봐야 할 텐데…”라고 하던 노관객의 말이 귓전에 남는다. 10여년 전 애써 댓글을 달아준 이들에게 관람을 권한다.


박희준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