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만들어진 제도가 우리의 사법 질서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작동하는 게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겠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초대 수장인 김진욱 전 공수처장은 지난 1월 퇴임 전 마지막 기자간담회에서 “공수처에 대한 비판과 비난을 감수하겠다”면서도 이렇게 말했다.
‘구속영장 청구 5건 중 발부 0건’, ‘기소한 3건 중 무죄 2건’. 공수처가 논란 끝에 2기 출범을 목전에 두고 있다. 공수처장 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달 29일 8차 회의 끝에 오동운·이명순 변호사를 2기 공수처장 후보로 추천할 것을 의결했다. 법조계에서는 공수처가 설립 목적을 달성하고 하나의 수사 기관으로서 자리 잡기 위해선 공정한 처장 인선뿐만 아니라 제도적 보완이 선행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공수처의 수사·기소권이 지나치게 제한돼 있다는 점이 문제 중 하나로 꼽힌다. 공수처가 수사·기소할 수 있는 대상이 협소하며, 수사·기소권이 불일치해 공수처의 설립 목적 자체가 흔들리고 있고 이는 공수처의 위상 하락을 야기한다는 지적이다.
◆‘수사·기소권 불일치’로 구조 불안정…검찰과 기싸움도
최근 ‘감사원 간부 뇌물 의혹 사건’을 둘러싼 공수처와 검찰의 줄다리기에서도 이 같은 문제점이 드러났다. 공수처 수사2부(부장검사 송창진)는 지난해 11월 감사원 3급 공무원 김모씨의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혐의 사건을 검찰에 보내고 공소제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검찰은 지난 1월 추가 수사가 필요하다며, 사건을 공수처로 돌려보내겠다고 밝혔다. 공수처는 검찰이 돌려보낸 사건 접수를 거부하며 “검찰의 사건 이송은 어떠한 법률적 근거도 없는 조치”라고 반박했다.
두 기관 간 기싸움으로 인해 사건은 여전히 표류하고 있는 상황이다. 전직 공수처 관계자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분리돼 있는 현 체계는 굉장히 불안정하다”며 “공수처가 수사한 사건을 검찰로 보내야 하는 구조하에선 (공수처가 검찰을 견제하기보다) 검찰이 공수처를 견제하기 더 좋다”고 꼬집었다.
현행법상 공수처는 대통령, 국회의장 및 국회의원, 대법원장 및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및 헌법재판관, 국무총리, 국가정보원·감사원·국세청 등 특정 정부기관 소속의 3급 이상 공무원, 장성급 장교 등 고위공직자를 수사할 수 있다.
반면 직접 기소 대상은 대법원장 및 대법관, 검찰총장, 판사 및 검사, 고위직 경찰에 한정된다. 수사 대상 범죄도 직무유기, 피의사실공표, 공무상 비밀누설, 횡령·배임 등 직무와 관련된 범죄에 국한된다. 감사원 3급 공무원은 공수처의 수사 대상이지만, 기소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공수처는 검찰에 사건을 송부할 수밖에 없었다.
수사 대상의 제한은 공수처 검사들이 수사를 원활하게 하지 못하는 요인이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통상 뇌물죄 수사는 기업인의 자금 관련 범죄에서 시작되고, 범죄 자금의 사용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공무원이 뇌물을 수수한 혐의가 포착된다. 그러나 고위공직자가 직접 범한 죄에 대해서만 수사할 수 있는 공수처는 피의자로 입건되지도 않은 공여자 측 진술을 확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 대우산업개발 경무관 뇌물 의혹, 전현희 전 국민권익위원장 표적감사 의혹 등 공수처가 수사 중인 사건은 참고인들이 조사에 협조하지 않으면서 원활한 수사가 이뤄지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공수처 관계자는 “공여자 측의 진술이 확보되지 않은 뇌물 수사는 상정하기조차 어렵다”며 “‘해당 고위공직자가 직접 범한 죄’로 수사 대상을 한정한 문구는 공수처의 최대 걸림돌이고, 삭제돼야 할 독소조항”이라고 강조했다.
이근우 가천대 법학과 교수는 “공수처는 검찰·경찰과 달리 정보를 수집하는 조직도 없다”며 “공무원의 경우 강제로 참고인 조사를 할 수 있는 등 특별한 수사권이라도 부여해 고위공무원들에게도 조사받기 부담스러운 조직을 만들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인력 확충 급선무”… 법 개정안은 계류 중
공수처 전현직 관계자들은 무엇보다도 수사 인력 확충이 급선무라고 입을 모은다. 공수처법상 공수처는 처장과 차장을 포함한 25명의 검사와 40명의 수사관을 둘 수 있다. 현재 공수처 인원은 검사 21명, 수사관 37명이다.
이를 두고 약 7100명에 달하는 고위공직자의 권력형 부패 범죄를 수사하기엔 공수처의 수사 인력이 너무 적다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수사만을 위해 꾸려졌던 특별검사의 규모도 검사 25명을 포함해 총 122명이었다.
공수처 검사들은 물밀 듯이 들이치는 고소·고발·진정 사건을 처리하기도 바쁘다고 입을 모은다. 공수처 출범 후 2021년 1월21일부터 지난해 12월22일까지 공수처에는 1만2683건의 사건이 접수됐고, 이 중 고소·고발·진정 사건은 55.9%(7094건)에 달했다. 익명의 공수처 관계자는 “공수처 검사 1인이 3년간 처리한 진정사건이 수백 건에 달할 것”이라고 토로했다.
학계에서는 문재인정부 초기에 구성된 법무·검찰개혁위원회가 제시했던 공수처법 원안대로 공수처의 수사 인력을 늘려야 한다고 제언한다. 원안은 검사 수를 30∼50명으로, 수사관 수를 50∼70인으로 규정했다. 한국정책능력진흥원도 공수처의 조직 운영 현황에 대한 진단과 역량 강화 방안을 담은 정책연구서에서 공수처에 총 40명의 검사와 80명의 수사관 인력이 필요하다고 진단한 바 있다.
이에 국회에서는 △검사·행정직원 정원 확대 △파견 검찰수사관을 정원에서 제외 등의 공수처법 개정안 등이 발의됐지만, 21대 국회가 막바지에 접어드는 현재까지도 계류 중인 상태다. 1기 공수처에서 벌어진 ‘검사 엑소더스(대탈출)’ 현상과 같은 잇단 인력 유출도 해결해야 할 또 다른 과제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