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씨는 직원들과 회사에서 드라마 얘기를 하던 중 “악역 남자 캐릭터가 한남(한국 남성을 비하하는 은어)”이라고 말했다가 회사 사장에게 불려갔다. 사장은 “그런 사상을 작업물에 써 회사에 피해를 줄 것 같다”고 얘기했다. 결국 A씨는 작업물에 피해를 줄 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각서를 써서 사장에게 제출해야 했다.
#지난해 11월 말 B씨는 서울 구로구 소재 게임회사 C회사의 채용 면접에 응했다가 황당한 질문을 받았다. 면접관 질문의 요지는 “이번 ‘뿌리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였다. 면접관이 언급한 뿌리사건은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뿌리’가 제작한 넥슨 메이플스토리의 홍보영상에 집게손가락 모양이 등장한 일이었다. B씨는 “면접관이 이미 ‘뿌리사태’라고 지칭했다는 점에서, 해당 논란을 피해자인 스튜디오 뿌리 잘못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며 “본인의 생각과 일치하는 답이 나오는지 아닌지 지켜보는 것처럼 느껴져 당혹스러웠다”고 증언했다.
게임 업계에서 ‘페미니즘 사상 검증’ 사례가 만연하자 노동계가 공동대응위원회를 구성하고 나섰다. 페미니즘사상검증공동대응위원회(공대위)는 기업과 정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게끔 압박하는 활동을 하겠다고 6일 밝혔다.
전국여성노동조합, 청년유니온 등 6개 단체는 이날 오전 서울 종로구 전태일 기념관에서 공대위 출범식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전국여성노동조합이 지난해 8월부터 12월까지 온라인 설문으로 받은 페미니즘 사상검증 제보 사례들이 공개됐다.
◆“포트폴리오 안 내리면 고소” 협박도
총 56명이 밝힌 사례 중에는 회사로부터 작업물 삭제 요청에 더해 손해배상 협박을 받은 일도 있었다. 한 응답자는 이전에 근무했던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당신이 포트폴리오로 쓴 우리 회사 게임의 원화를 전부 내리지 않으면 고소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했다. 이 응답자는 페미로 낙인찍혀 사이버불링과 스토킹을 겪고 있었다. 변호사 상담 뒤 “저도 협박으로 고소하겠다”고 응대하자 회사 측은 그제야 물러났다.
여성 노동자들은 채용이 이뤄진 뒤에도 사상검증은 공기처럼 만연해 있다고 증언했다. 한 응답자는 “회사는 소속 노동자, 외주 계약자를 가리지 않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공대위는 기업들이 노동자를 보호하는 대신 적극적으로 페미니즘 사상검증에 나서고 있다고 목소리를 냈다. 강미솔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변호사는 “페미 사상 검증은 표현의 자유 및 사상의 자유라는 헌법 가치를 침해하는 행위로 인권 탄압”이라며 “그런데도 기업들은 직원 보호를 하기는커녕 일부 게임 사용자의 요구에 따라 계약을 중지하는 등 불이익 대우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문제 기업들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적극적인 근로감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 압박해 노동자 보호하게 할 것”
공대위는 올해 크게 세 가지 방향으로 활동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페미 사상검증이 사회적인 문제임을 알리고 △신고 채널을 운영하고 △노동자를 보호하도록 기업과 정부를 압박하는 활동을 하는 게 주된 내용이다.
지난해 국정감사 이후 고용노동부가 게임회사들을 대상으로 산업안전보건법 제41조 위반 여부 점검에 나서긴 했지만 과태료 등 실질적인 조치로 이어지진 않았다. 산안법 제41조는 사업주에게 고객 응대를 주로 하는 근로자들이 폭언, 폭행 등의 위험으로부터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실이 고용부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서울지방고용노동청은 지난해 12월 서울 소재 게임업체 10곳을 특별점검해 3곳에 대해 근로자 보호 문구 게시 및 음성 안내, 고객 응대 업무 매뉴얼 마련, 매뉴얼 및 건강장해 예방 교육 실시 등을 권고하는 행정조치를 했다. 올해 1∼2월 중부지방고용노동청도 게임업체 5개사를 점검해 1개소에 대해 행정지도했다.
고용노동부 지방청은 올해 1월부터 사업장 안전보건 감독계획 대상에서 게임업종을 감정노동 고위험 업종으로 분류해 관리 감독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콜센터 전화상담원, 돌봄종사자, 호텔·병원·유통업체 고객 응대 종사자에 더해 게임회사 직원도 감정노동자로 보겠다는 취지다.
공대위 관계자는 “당국이 게임업종을 감정노동 고위험 업종으로 분류하는 것은 작지만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지난해 국정감사 등을 포함해 대응에 대한 성과가 있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