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가고 계절이 바뀌어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왔다. 곧 봄꽃 소식이 남쪽에서 차례로 북상할 터이다. 꽃망울이 터지는 만큼 겨우내 움츠렸던 우리 가슴도 열려 집 밖으로 나가 봄나들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가장 접근하기 좋은 봄나들이 장소가 궁궐이 아닐까 싶다. 궁궐에는 수백 년 된 나무가 즐비하고 연못이며 정자, 심지어 돌덩이 하나에서도 옛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야외의 자연에서는 찾을 수 없는 매력이 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오히려 사람들은 궁궐 나들이를 시뻐하고 교통 체증이 불 보듯 뻔한 교외로 향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 속에서도 개발의 압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 잘 보존된 곳이 궁궐이란 걸 깨달으면 궁궐이 봄나들이 장소로 제격이라는 것을 쉽게 인정하리라. 이번 봄 궁궐 나들이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키워드를 알고 가면 그동안 따분하거나 어렵게 느껴졌던 궁궐 나들이가 한층 즐거울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리라.
첫째, 배산임수(背山臨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풍수의 기본인 배산임수, 즉 ‘뒤에는 산이 있고 앞에는 물이 있는 장소가 명당’이라는 말은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궁궐은 산을 등지고 자리를 잡는데, 이때 뒤에 있는 산을 진산(鎭山)이라 한다. 경복궁의 진산은 북악산이고 창덕궁은 매봉이다. 그러니 궁궐 마당에 물이 흐르게만 하면 배산임수를 완성할 수 있다. 큰 면적을 차지하는 궁궐은 빗물을 받아 흘릴 큰 배수로가 필요한데, 이 배수로를 자연스럽게 궁궐의 앞마당으로 통과시켜 배산임수의 조건을 완성한다. 이때 궁궐 앞마당을 흐르는 이 물길은 ‘함부로 건널 수 없는 개울’이라는 의미로 금천(禁川)이라 한다. 이는 행여 나쁜 기운이 궁궐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여기에 놓이는 다리를 금천교(禁川橋)라 하고 금천교 곳곳에는 천록, 해치, 거북 등 갖가지 신령스러운 동물을 조각해 물길을 지키게 했다.
둘째, 동궁(東宮)이다. 궁궐의 동쪽은 왕세자의 공간이었다. 세자는 임금의 후계자로 마치 떠오르기 전의 태양과 같은 존재이므로 해가 뜨는 궁궐의 동쪽에 거처를 마련하고 그 일대를 ‘동궁’이라 하고 세자를 ‘동궁’이라고도 불렀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공히 임금의 거처 동쪽에 동궁을 두었다. 특히 경복궁의 동궁이었던 자선당(資善堂)은 아름답기로 유명했는데 1914년 이를 탐한 일본인 사업가 오쿠라 기하치로가 조선총독부의 양해하에 일본 도쿄로 뜯어가 자기 집에 이축했고 1923년 도쿄 대지진 때 불타버린 사실은 유명하다. 지금은 불타고 남은 초석만 돌아와 경복궁 건청궁 부근에 전시되어 있다.
셋째, 동조(東朝)다. 왕실의 어른인 대비의 거처는 ‘동조’라 하여 궁궐의 동쪽에 배치했는데 이는 중국의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한나라의 궁궐인 미앙궁(未央宮) 동쪽에 황제의 어머니인 태후가 생활하던 장락궁(長樂宮)이 있었다. 이 때문에 태후의 거처인 장락궁을 ‘동조’라는 별칭으로 불렀고 태후를 ‘동조’라고도 했다. 이 고사에 따라 조선에서도 왕대비나 대왕대비를 ‘동조’라 했고 이들의 거처 또한 ‘동조’라 하여 궁궐의 동쪽에 두는 것을 법도로 여겼다.
넷째, 전조후침(前朝後寢)이다. 이는 궁궐의 앞쪽에는 공적인 공간을, 뒤쪽에는 임금의 침전을 둔다는 배치의 원칙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앞쪽에는 으뜸 전각인 근정전, 임금의 집무실인 사정전, 임금을 보좌하는 여러 관청으로 구성된 궐내각사 등이 자리 잡고 뒷부분은 임금과 왕비의 처소인 강녕전과 교태전이 있다. 창덕궁의 경우 앞쪽에는 으뜸 전각인 인정전, 왕의 집무실인 선정전, 그리고 역시 궐내각사 등이 있고 뒤쪽에는 임금과 왕비의 침전인 희정당과 교태전이 있다.
다섯째, 구중궁궐(九重宮闕)이다.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왕조의 위계질서 아래 임금의 거처는 궁궐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다. 임금이 있는 궁궐을 ‘구중궁궐’이라 했는데, 이는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궁궐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효종 때 영돈녕부사 김육은 상소문에서 “대개 제왕의 거처는 깊숙하게 하려고 아홉 겹으로 안을 장엄하게 하고 빙 둘러 건물을 밖에 나열합니다.”라고 했다. 여기서 ‘아홉’은 숫자 중 가장 큰 숫자이므로 겹겹이 둘러싸는 임금의 거처를 강조하기 위한 은유적인 상징이다. 경복궁의 경우 임금의 거처인 강녕전과 집무실인 사정전 주변을 모두 복원해 구중궁궐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지만, 창덕궁의 경우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과 거처인 희정당이 외부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본래의 모습을 복원하지 않고 빈 마당으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후원(後苑)이다. 궁궐의 뒤에는 ‘후원’이라 하여 정자와 연못을 갖춘 동산을 두어 업무에 지친 임금이 자연을 벗 삼아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경복궁은 청와대 자리가 후원이었고 비원이라고 잘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오히려 앞쪽 궁궐보다 면적이 넓다. 궁궐의 뒷동산은 임금의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라 비록 벼슬이 높은 신하라 할지라도 임금의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엄중한 곳이었다. 이렇게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곳이라 하여 ‘금원(禁苑)’이라고도 했다.
이처럼 궁궐을 배치하는 데에는 앞에서 살펴본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왜 이러한 원칙을 정해 놓았을까? 왕조 시대의 궁궐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호화로운 국가 시설이었기에 이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데에는 나름의 명분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당시의 지배 이념과 문화에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고 명분을 도출함으로써 왕실의 권위와 정당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최종덕 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