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 위기가 코앞에 다가온 1997년 4월25일 국회에서 청문회가 열렸다. 한보그룹의 불법 대출 등 각종 비리 의혹을 규명하기 위한 자리였다. 당시 김영삼(YS) 대통령의 차남이자 문민정부 내내 정권 최고 실세로 꼽힌 김현철씨가 증인으로 출석해 의원들의 사나운 추궁을 받았다. 아들이 고난을 겪는 모습에 YS는 물론 영부인 손명순 여사도 속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청와대 관계자가 언론에 전한 바에 따르면 그날 손 여사는 외부인과의 접촉을 다 끊고 텔레비전도 틀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손 여사가 대통령 뜻에 따라 담대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고 있으나 최근에는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그 시절 YS 부부, 그리고 청와대의 분위기가 얼마나 암울했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현철씨는 한보에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당대의 특수통 검사들이 포진한 대검 중수부는 차츰 포위망을 좁혀 왔다. 청문회 출석 후 20여 일 만인 1997년 5월17일 현철씨는 결국 검찰에 구속됐다. 그날 손 여사는 청와대 내 관저에 하루종일 머물며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당시 보도를 보면 아들이 구속되기 며칠 전부터 청와대 경내 산책을 중단하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구치소에 면회라도 가고 싶은 것이 모정(母情)일 테지만 영부인으로서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현철씨 아내는 훗날 언론 인터뷰에서 “어머님(손 여사)이 직접 면회를 다녀온 적은 없다”며 “(내가) 면회를 하고 나서는 곧바로 청와대에 들어가 남편의 근황을 전하고 있다”고 했다.
대법원에서 징역 2년이 확정된 현철씨는 김대중(DJ)정부 임기 도중인 1999년에야 사면됐다. YS와 손 여사는 DJ가 취임 직후 아들을 사면하지 않은 점을 무척 서운하게 여긴 것으로 전해진다. 아무튼 자신을 억누른 족쇄에서 벗어난 현철씨는 YS의 후광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정계 진출을 도모하고 나섰다. 그런데 국회의원이 되는 길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또 기소돼 재판을 받는 시련까지 감내해야 했다. 숱한 시행착오를 겪고 어느덧 65세가 된 현철씨가 아직도 ‘금배지’에 미련이 남아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YS의 경쟁자였던 DJ의 세 아들 홍일, 홍업, 홍걸씨가 모두 국회의원을 지낸 점을 감안하면 본인이 처한 현실이 다소 야속하게 느껴질 법하다.
지난 7일 95세를 일기로 별세한 손 여사가 11일 발인식을 끝으로 영면에 든다. 2015년 YS가 서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현철씨가 상주(喪主) 역할을 했다. 대통령 비서실장부터 야당 대표까지 숱한 조문객들을 맞이하며 그는 어떤 상념에 사로잡혔을까. 아마도 부모님 생전에 영어의 몸이 되고 또 유죄 판결을 받은 일이 뼈에 사무쳤을 것 같다. 본인이 국회 청문회에 출석한 날, 그리고 검찰에 구속되던 날 식음을 전폐하며 괴로워했던 어머니 손 여사를 떠올리며 속으로 눈물을 훔쳤는지도 모르겠다. 옛 노래 중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곡도 있지 않은가. 한국 민주화에 공헌한 YS와 손 여사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현철씨도 이 나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로 영원히 기록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