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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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푸틴 편?…“백기 들 용기” 발언, 전황 악화 우크라 겨냥했나

교황 잇단 러 두둔 발언 배경은?

교황청, 교황 ‘백기’ 발언 수습 진땀
교황 과거에도 “위대한 러시아 후예” 표현
친러 아르헨티나 출신 영향 가능성

“백기를 들고 협상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나온 프란치스코 교황의 발언이다. 발언이 연일 논란이 되며 교황청이 수습에 나섰다. 러시아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발언으로 교황이 비판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교황의 출신지가 전쟁을 보는 시각에 편파적으로 보게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나오는 배경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로이터연합뉴스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은 12일(현지시간) 이탈리아 현지 언론에 교황이 언급한 ‘백기’가 “적대행위의 중단을 의미한다”고 해명했다. 교황청 2인자로 꼽히는 파롤린 추기경이 직접 파문 진화에 나선 것이다. 교황이 종전을 위해 우크라이나가 항복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밝혔다는 해석에는 선을 그은 것이다. 그는 이날 이탈리아 일간 코리에레델라세라와 인터뷰를 통해 교황 발언의 취지는 ‘영속적인 평화로 이어질 외교적 해결을 위한 조건’을 제시하는 데 있었다고 밝혔다.

 

러시아를 염두에 둔 비판도 제기했다. 파롤린 추기경은 러시아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침략을 끝내는 것이 협상을 통한 해법의 전제조건”이라며 “침략자들이 먼저 공격을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교황은 지난 9일 공개된 스위스 공영방송 RTS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상황이 악화하기 전 협상할 용기가 있어야 한다며 “상황을 보며 국민을 생각하고 백기를 들고 협상할 용기가 있는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또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협상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며 전황이 불리해진 우크라이나에 러시아와 협상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제기됐다.

 

지난 2019년 10월 10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에서 열린 접견 행사 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파롤린 추기경은 교황청 뉴스 포털을 통해서도 우크라이나에서의 외교적 해결과 정의롭고 영속적인 평화의 조건 조성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측을 위한 것이라며 “첫 번째 조건은 (러시아가) 침략을 끝내는 것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교황의 ‘백기’ 발언은 해당 용어를 쓴 인터뷰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은 당시에도 “협상은 절대 항복이 아니다”는 표현을 썼다고 덧붙였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교황의 해당 발언 직후 “교회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한다”며 “살고자 하는 사람과 당신을 파괴하려는 사람을 사실상 중재하려면 2500㎞ 떨어진 곳에 있어서는 안 된다”며 프란치스코 교황을 향해 날 선 목소리를 냈다.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이 발언과 관련해 자국 주재 교황대사를 불러들여 항의했다. 우크라이나 외무부는 “백기를 드는 용기를 내 침략자와 협상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한 교황의 발언에 실망했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바티칸 소식통조차 AFP에 교황이 “항복과 동의어인 ‘백기’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이런 발언은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지적했다.

 

지난 2023년 5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바티칸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은 과거에도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러시아를 두둔하는 듯한 화법을 쓴다고 비난을 받아왔다. 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나 대통령이나 러시아에 대한 공개적인 비판을 자제한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교황은 전쟁 발발 이후 2022년 5월 이탈리아 일간 라스탐파에 “러시아 문 앞에서 나토가 짖은 게 어쩌면 푸틴의 행동을 촉발했을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유발한 것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라는 취지로 발언해 논란을 빚었다.

 

또 같은해 11월에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로 쳐들어온 군인 중 “가장 잔인한 건 러시아의 전통에 속하지 않은 체첸인, 부랴트인 등등”이라며 “물론 침략자가 러시아 정부라는 건 분명하다”고 발언했다. 러시아 내 소수민족을 손가락질하며 마치 전쟁범죄에 러시아군 대다수는 책임이 없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발언이었다.

 

작년 8월에는 화상 연설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모인 러시아 청년 신자들에게 “여러분의 유산을 잊지 말라. 여러분은 위대한 러시아의 후예”라고 말하면서 러시아 제국의 초대 황제였던 표트르 대제와 마지막 여제 예카테리나 2세를 칭송하는 듯한 발언을 해 서방 진영의 반발을 부르기도 했다.

 

이를 두고 교황이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인 아르헨티나 출신이라는 점이 객관적이지 않은 발언을 야기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병력을 집결하던 2022년 2월 초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우리는 국제통화기금(IMF)과 미국에 너무 의존하고 있다”며 “이를 멈춰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다른 나라들에 길을 열어줘야 한다”며 “러시아는 그 길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에 있다”고 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2022년 한 보고서에서 중남미 국가는 경제 논리 탓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강한 비판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아르헨티나의 경우 러시아군이 철수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푸틴 대통령을 직접 겨냥한 발언은 하지 않았다”며 “이는 아르헨티나가 러시아나 중국과 무역 관계를 강화하려 했던 행보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풀이된다”고 설명했다.


윤준호 기자 sherpa@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