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오후 찾은 울산 남구 울산도서관. 울산시가 운영하는 지역 대표 시립도서관이다. 대리석이 깔린 도서관 1층 출입문을 지나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900여㎡ 크기의 지하 창고가 나타났다. 회색 철문으로 된 입구를 열고 들어가자, 철로 된 책장에 소설·수필·인문학 등 책이 가득 쌓여 있었다. 습도 조절 장치가 있었지만 꺼져 있었다. 오랫동안 책들이 창고에 있었던 듯 퀴퀴한 책 먼지 냄새가 났다. 일부 책은 찢어지는 등 훼손 흔적이 역력했다.
이렇게 지하 창고에 방치 중인 책은 모두 24만여권. 1권당 1만원씩 계산하면 구매가 기준 24억원어치다. 한 달에 150만∼200만원씩, 최대 1억4200만원의 책 보관 비용이 별도로 쓰였다. 도서관 한 관리인은 “지하 창고 책들은 시민들이 빌리거나 찾아서 볼 수 있는 책이 아니라 8년째 보관만 하는 거라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세금으로 사들인 수십만권의 책이 울산의 한 도서관 지하 창고에 방치되고 있다. 읽히지도, 쓰이지도 않은 이들 책은 왜 창고에 있는 걸까. 19일 울산시교육청과 중구 등에 따르면 24만여권의 책은 2018년 초 울산도서관 지하 창고로 옮겨졌다. 인근에 있던 울산 중부도서관이 문을 닫고, 중구가 ‘종갓집’이란 이름의 새 도서관을 짓기로 하면서 임시적으로 창고에 넣어 둔 것이다. 중구 관계자는 “원래는 올 6월 전에 종갓집도서관이 다 지어질 계획이었는데, 7월 이후로 미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종갓집도서관이 다 지어져도 24만권의 책을 고스란히 옮길 수 없다는 점이다. 새 도서관에는 4만8000여권만 들이고 20만권에 육박하는 나머지는 그대로 창고에 둬야 하는 ‘처치 곤란’ 도서인 셈이다. 중구 관계자는 “중부도서관에 있던 신간도서가 2016년에 나온 책들이다. 종갓집도서관엔 16만권 정도의 책을 둘 수 있는데, 모두 예전 책으로만 채울 수는 없어서 10만권 중 4만8000여권만 새 도서관에 두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중구의회 홍영진 의원은 “향토지와 지역 문인 작품집부터 우리가 미처 모르는 보물 같은 도서가 숨겨져 있을 수 있다”며 “종량제 쓰레기 버리듯 업자에게 책을 넘기거나, 잘 알지 못하는 기관에 뭉텅이로 책을 갖다 주는 것은 안 될 말”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울산도서관 지하 창고엔 외솔 최현배 선생의 ‘한글바른길(1945년)’ ‘조선말본(1948년)’ 초판 등 중요 서적도 다수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당국도 이들 책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심하고 있다. 중구 관계자는 “40년이 넘은 책도 있고, 교육·법전·교재와 같은 책들이 많아 24만권을 모두 다시 쓰긴 어렵다”며 “조례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책을 나눠 줄 수 있도록 하는 등 최대한 활용 방안을 마련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중구에 이관하고 남은 책 17만8000권 중 17만3000권은 통도사에 기증하고, 개인 논문 등 5000권은 폐기하려고 협의 중”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