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독자와의 만남’에서 있었던 일이다. 정해진 순서가 끝나고 관객과의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관객 한 분이 조용히 손을 들고 물었다. “평론가님, 사는 것도 힘든데 왜 일부러 어두운 소설을 읽어야 합니까?” 이제 와 그날 얘기를 꺼내는 건 그때 내 답변을 만회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언뜻 우문처럼 들리는 그 말에 의외로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듯한 반응을 보였고, 한 달이 지난 오늘까지도 그 반응이 잊히지 않는 까닭이다. 가뜩이나 사는 것도 힘든데 어두운 소설만 읽는 나는 고통 애호가일까.
일찍이 많은 예술가가 인간 성격의 유형화를 시도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테오프라스토스는 품행이 나쁜 캐릭터를 ‘아첨꾼’에서 ‘비방꾼’까지 30개 유형으로 목록화했고 마크 트웨인처럼 예리한 관찰력과 유머를 가진 작가들은 눈엣가시 유형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심의 역사가 깊은 데 비해 보편적이고 체계적인 유형화를 확립한 사람은 없었던 모양인지 혼돈을 잠재우고자 심리학자들이 나섰다. 심리학자들은 인간 성격을 5개 범주로 분류했다. 개방성과 폐쇄성, 성실성과 변덕, 외향성과 내향성, 원만함과 논쟁적임, 합리성과 신경증적이 그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는 카를 융의 초기 분석심리학 모델을 바탕으로 소설가 캐서린 쿡 브릭스와 그의 딸이자 정치학을 전공한 미스터리 소설가 이자벨 브릭스 마이어스가 1944년에 개발한 자기보고형 성격 유형 검사다. 심리학과 문학의 컬래버로 만들어진 이 개념은 성격을 16가지 유형으로 구분해 자신과 타인에 대한 빠른 ‘이해’에 도달하게 해 준다. MBTI는 선입견을 옹호하는 성공적인 상품이다.
당연히, 성격의 다양성이 고작 16가지 다양성일 리 없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시나리오 작법서 ‘로버트 맥키의 캐릭터’는 인간 성격을 가리켜 “심리학자들이 구분한 5가지 스펙트럼이 섞이고 혼합돼 무한한 가능성”으로 변주되는 그 무엇이라 정의한다. 각각의 성향이 스펙트럼의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충돌하며 뒤섞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개인의 유전자와 그들을 둘러싼 환경의 무수한 양상들 사이에서 매일 수억 가지 충돌이 무작위로 일어나는 데다 그 충돌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 로버트 맥키는 그 충돌을 ‘우연’이라 부른다. 인간 성격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건 우연의 개입으로 무한정 다양한 자아가 출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설사 그 우연들마저 유형화할 수 있다 해도 우리는 끝내 타인의 성격을 알 수 없다. 인간은 인간 앞에서 가면을 쓰기 때문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인간 유형화를 시도한 건 그만큼 인간 성격이 미지의 영역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서머싯 몸의 말마따나 “고갈되지 않는 유일한 주제는 인간의 본성”인 것이다. 요컨대 성격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주제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포기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읽는 것이 소설이다. 탁월한 소설은 한 사람의 복잡한 성격을 실감나게 그린다. 소설은 선입견에 반대하는 성공적인 상품이다.
그날 나는 ‘로버트 맥키의 캐릭터’에서 읽은 내용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요약하면 이렇다. 어둠은 진실이 드러나는 환경이다. 가장 밝은 순간 캐릭터가 내리는 선택에는 그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다. 그가 치를 대가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어두운 순간 그가 부정적인 힘 앞에서 모종의 위험을 무릅쓸 때, 그의 행동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 준다. 지금 다시 답한다면 이 한마디를 덧붙일 것 같다. 인간이 우리가 알고자 하는 진실의 대상이라면, 그 구체적 양태인 성격이 밝고 유쾌한 가운데 드러나는 건 본 적이 없다고. 어두운 책만 읽는 나는 고통 애호가가 아니라 진실 애호가인 것 같다고.
박혜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