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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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위, 유엔 보고서에서 차별금지법 권고 삭제했다

국회서 합의 안 된 문제 권고할 수 없단 인권위
“반인권적 위원들로 누더기 보고서 채택”
대통령·여당 임명 인권위 위원 둘러싼 파문

국가인권위원회가 유엔 산하 위원회에 제출하는 보고서 내용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를 삭제했다. 과거 인권위는 차별금지법 권고법안을 만들어 국무총리에게 입법을 권고했었다. 이번 보고서 채택은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로 두 차례 무산 끝에 이뤄졌는데, 다른 쟁점을 두고도 인권위 위원들 사이 갈등이 지속하고 있다.

 

인권위가 제6차 전원위원회를 열고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에 제출할 독립보고서를 지난 25일 채택했다. 이 보고서는 한국의 유엔여성차별철폐협약 이행 상황을 점검하고 그에 관한 인권위의 의견을 정리한 문서다. CEDAW는 5월13∼31일 한국 정부를 상대로 심의할 예정이다. 

 

사진=연합뉴스

인권위는 2006년 차별금지법 권고법안을 의견하고 이에 기반한 입법 추진을 국무총리에게 권고했다. 이 권고법안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권리에관한국제규약’ ‘여성차별철폐협약’ ‘인종차별금지협약’ 등에 준해 인권위가 약 3년에 걸쳐 만들었다. 차별의 정의를 구체적으로 정하고 실효성 있는 차별 구제수단을 마련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0여년 전부터 여러 유엔 인권 관련 기구는 한국 정부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했다. CEDAW뿐만 아니라 유엔 자유권위원회, 사회권위원회, 아동권리위원회의 권고가 있었다. 유엔 인종차별철폐위원회는 2003년부터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고, 유엔인권이사회 국가별 정기검토(UPR)에서도 같은 지적이 있었다. 실제 미국, 영국, 캐나다, 뉴질랜드, 독일 등이 국제사회의 차별시정 요구로 차별금지법을 제정했다.

 

전날 전원위에서 차별금지법 제정 권고를 삭제해야 한단 입장의 근거는 ‘국회에서도 제정하지 못한 법을 인권위가 권고할 수 없다’는 것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국가인권위원회법 제19조는 인권위의 업무가 ‘입법 과정에 있는 것을 포함한 인권에 관련 법령·제도·정책·관행의 조사와 연구 및 그 개선이 필요한 사항에 관한 권고 또는 의견의 표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독립 기관으로서 인권위는 국회에서 상황과 별개로 필요한 경우 권고와 의견 표명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쟁점 사안들을 두고도 이견 조율이 쉽지 않았다. 보고서에는 일본 정부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의 진상을 밝히고 공식 사과와 법적 배상을 하도록 한국 정부가 촉구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앞선 전원위에서 대통령과 여당인 국민의힘 추천으로 각각 임명된 김용원·이충상 상임위원은 해당 내용을 보고서에 넣지 말자고 주장해 채택이 무산됐다. 이번 전원위에서는 김 위원과 이 위원의 반대의견을 보고서에 넣는 식으로 합의가 이뤄졌다.

 

원안에는 포함돼 있던 ‘형법 제297조 개정 권고’도 빠졌다. 해당 권고는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과 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바꾸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한다. 2018년 CEDAW는 동의 여부로 강간을 정의하라고 권고했고, 국회에서도 개정법안이 발의됐지만 폐기됐다.

 

이번 보고서 채택을 두고 인권단체들은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대통령과 여당이 임명한 위원들로 인해 인권위 회의에서 파행이 거듭되고 있다는 주장이다. ‘경로이탈 국가인권위원회 바로잡기 공동행동’은 이날 성명서를 내고 “반인권적인 위원들의 반대로 인권위 독립보고서가 제대로 내용을 담지 못한 채 채택됐다”며 “앞으로 반인권 위원의 인선을 막겠다”고 밝혔다.


윤준호 기자 sherpa@segye.com